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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긍정스위치 Feb 10. 2023

나의 아지트

그곳이 어디든

어릴 때 집에 나무 책상이 하나 있었다.

세 자매 중 둘째인 나는 주로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역할이었다.

그럴 때면 속상한 마음에 그 나무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무슨 일만 있다 하면 그 책상 밑으로 들어갔으니 꽤 자주 들어갔었다.

좋게 말하면 생각하는 중이고 나쁘게 말하면 삐져있는 상태이다. 요즘말로 뒤끝작렬이라고 해야 하나.


책상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꽁해 있는데도 부모님은 한 번도 나를 강제로 끄집어낸 적이 없었다. (나 같았으면 당장 나와! 하나, 둘, 셋! 이렇게 얘기했을 텐데) 항상 충분히 생각하고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책상 밑에서 나온 후에도 한 번도 혼내지 않으셨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고졸이지만 대졸인 나보다도 그 당시에 더 똑똑하셨고 현명하셨던 듯하다. 그 시기에는 오은영 선생님도 없었고, 우리집엔 그 흔한 육아서 하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때의 나는 왜 하필 책상 밑으로 들어갔을까. 책상 밑으로 들어가 쪼그려 앉아서 생각하다 보면 저절로 기분이 풀리곤 했다. 기분이 나아지면 다시 책상밖으로 나왔다.(엄마말로는 책상 밑에서 한참을 안 나와서 가보니 잠들어 있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책상 밑이라는 공간은 나에게는 생각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였다.




책상 밑은 아니지만, 내가 거의 매일 찾는 곳이 있다.

집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작은 '힐링숲'이다. 작은 규모지만 나에게는 꽤 소중한 공간이다.

오늘 아침에 찾은 힐링숲은 전날 밤 비가 살짝 온 뒤라 나무 냄새가 더 짙게 느껴졌다.

비 온 다음 날의 나무 냄새는 참 좋다. (중고등 시절에는 향기 나는 편지지 같은 게 있었던 듯한데,  온라인 텍스트에도 향기 첨부기능이 있다면 오늘 맡았던 짙은 나무 냄새를 첨부하고 싶다. )


한적한 힐링숲을 걷다 보면 오롯이 나의 생각에 집중을 할 수가 있다. 고구마를 백개 먹은 듯 마음이 답답한 날에도, 내가 한없이 초라해 보이는 순간에도, 미래의 내 모습이 선명히 그려지지 않을 때도 힐링숲에 들어가서 나무냄새 맡으며 걷다 보면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느새 한결 더 가벼워져있다.

사계절에 따라서 때가 되면 그 시기를 알고 스스로 변화하는 숲의 모습은 자연의 섭리를 새삼 느끼게 해 주고 나를 더 겸허하게 해 준다.


힐링숲의 봄 - 봄이 되면 벚꽃, 철쭉을 볼 수 있다(노란꽃 이름을 모르겠다)
힐링숲의 여름 - 여름엔 연꽃향이 좋다
힐링숲의 가을 - 붉은 단풍잎과 하얀 구절초를 볼 수 있다
힐링숲의 겨울 - 지난번 눈이 많이 왔을 때 설경이 참 멋졌는데 사진을 못 남겼다


오늘 애썼을 그대에게.

책상도 좋고 힐링숲도 좋다.

그대가 마음껏 생각하고 기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어디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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