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만 머물다 나오려고 했던 조리원이었지만, 병원에서 금방 나온 셋째까지 데리고 당장 집으로 가기는 어려웠다. 조리원에 일주일 더 머물며 셋째와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내가 머문 조리원은 다른 곳의 반값정도로,저렴한 곳이었다.)
첫째와 둘째를 데려온 기쁨도 잠시, 셋째만 생각하면 마음이 아픈 날들이었다. 첫째와 둘째를 보면서도 셋째가 그리웠다. 그런 셋째를 데려오게 돼서 너무 기뻤다.
담당교수님과 상담을 하고 니큐 입구 안으로 들어간다.세상에나, 또 내가 누워있다. 둘째에 이은 또 다른 내 미니미.
둘째와 셋째는 일란성쌍둥이 아들이다. 둘이 똑같이 생겼다. 큰일 났다. 구분을 못하겠다. 둘이 몸무게 차이가 나긴 해도 알아챌 정도로 크기차이가 나는 건 아니다. 팔찌에 이름이 적혀 있지만 나중에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걱정이 된다.
귀염뽀작 막둥이
셋째를 안아본다. 아직 눈 마주침을 할 수 없는 시기지만, 왠지 셋째가 나의 눈을 쳐다보는 것 같다.
너는 내가 엄마라는 걸 알까. 배 속에서 듣던 내 목소리를 기억할까. 기억했다 한들,그 기억이 다 잊혀지진 않았을까.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체취를 맡고, 젖을 물었어야 할 네가 인큐베이터에 혼자 너무 오래 누워있었구나.
슬픔이 자꾸만 내 가슴 위로 올라오려 한다. 천진한 아이의 얼굴을 보며 올라오는 슬픔을 지그시 눌러본다. 이제는 슬퍼할 필요가 없다. 지나간 일은 흘려보내고, 행복할 미래만을 기대하면 될 일이다.
신생아실에 아이 셋이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다. 셋째가 조리원에 들어온 후 모유는 무조건 냉장고에 보관하여 다음 수유콜 때 들고 갔다. 유축시간과 수유콜 시간이 맞으면 유축을 하지 않고 내려가 아이들에게 직수를 했다. 타이밍이 맞으면 세 아이를 차례대로 먹였다. 기쁜 마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지막으로 먹인 아이를 다시 돌려보내면, 어느새 2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세 아이를 다 보고 만지는 일은 즐거웠지만, 한번 그러고 나면 다음 수유콜은 쉬어야 했다.몸이 너무 아팠다.
집에 가면 쉴 수 있는 수유콜은 더 이상 없을 텐데. 지금은 동시에 배고프다고 울면 다른 아이들은 관리사님들이 먹여주시지만, 집에 가면 어떡해야 할까. 점점 현실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소천사 너희들
임신 전부터 아이를 낳으면 완모(완전모유수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한 명이었다면 나는 당연히 완모를 했을 것이다. 쌍둥이만 되었어도 완모에 도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 가슴은 두 짝, 아이는 셋. 셋 키우기도 힘든데 모유수유까지는 큰 욕심인 것 같았다. 거기다 내 모유의 양도 가늠할 수 없었기에, 조리원에 있는 동안만 최선을 다해 먹이고 조리원 퇴소 전 단유 마사지를 받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내 모유는 점점 늘어갔다. 모아둔 모유를 들고 신생아실에 갈 때마다 관리사님들은 입을 벌리며 놀라셨다. 아직 아이들이 먹는 양이 적긴 했지만, 셋을 다 먹이기에도 충분한 양이었다.
그렇다. 나도 몰랐지만, 나는 모유퀸이었다. 매시간 모유를 짜내는 것은 큰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모유를 버리고 아이들에게 분유를 먹이기는 아까웠다. 일단 집에 가서 되는 데까지 한번 해보기로 했다. 더 이상 불가능할 것 같이 힘들 때, 그때 단유해도 될 일이다. 조금이라도 아이들에게 내 모유를 더 먹이고 싶었다.
조리원에서의 마지막 식사
조리원에서 한 달. 몸을 회복하기 위해 한약과 영양제를 퍼부으며마사지를 받고, 도수치료도 받았다. 아직 아픈 곳 투성이었지만, 아이를 막 낳은, 그때보다는 많이 회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