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대가 없는 동안 나의 아들 타트가 존재하는 것들의 본질을 배우기를 원하였고, 각 단일한 점에 대한 가르침의 그노시스(gnosis)에 갓 입문한 어린 아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여 내가 그것을 미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에, 나는 그가 그것들을 관조하는 것을 더 쉽게 따를 수 있도록 더 많은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나는 말해진 것들 중 가장 으뜸 되는 요점들을 골라, 그대에게 간략히 써 보내고자 하니, 더 나이가 많고 본성(Nature)에 정통한 이에게 하듯이, 그것들을 더 신비롭게 설명하려 한다.
2. 만일 드러난 모든 것들이 과거에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만들어진 것들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그리고 만들어진 것들은 다수이며, 아니 더 나아가, 드러난 모든 것들과 모든 다른 것들이며 서로 같지 않다면, 그리고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은 그들 자신 외의 다른 이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면, 이들을 만드는 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보다 더 오래되었다.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말하건대, 그들 자신 외의 다른 이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그 존재를 만들어짐에 빚지고 있는 것들 중에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그것(That which is not able to be made) 외에는, 그들 모두보다 더 오래된 것은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3. 그러므로 그는 지극히 높으시며, 하나이시며, 유일하시고, 만물에 있어 진실로 현명하시니, 그 자신보다 더 오래된 것을 가지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의 수와 크기와 차이, 그리고 그 만들어짐의 연속성 또한 다스리신다.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은 보이지만, 그는 보일 수 없다. 이 까닭에 그는 만드시니, 그가 보일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그는 영원히 만드시며, 그러므로 그는 결코 보일 수 없다. 그를 이처럼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며, 이해하고서 경이로워하는 것이 합당하며, 경이로워하고서 자신의 아버지를 알게 되었음을 스스로 축복받았다고 여기는 것이 합당하다.
4. 자신의 참된 아버지보다 더 감미로운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시며, 우리는 어떻게 그를 아는 법을 배울 것인가? 그에게만 신(God)이라는 이름, 혹은 제작자(Maker)라는 이름, 혹은 아버지(Father)라는 이름, 아니 오히려 그 셋 모두를 바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그의 권능(Power)을 위해서는 신이라, 그의 에너지(Energy)를 위해서는 제작자라, 그의 선(Good)을 위해서는 아버지라 말이다. 이제 권능은 만들어지고 있는 것들과 다르며, 에너지는 모든 것이 만들어지고 있음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황함과 어리석은 말을 버리고, 이 둘, 즉 만들어진 것과 제작자를 이해해야 한다. 그들 사이에는 중간 항이 없으며, 제3의 것도 없기 때문이다.
5. 그러므로 네가 생각하는 모든 것에서, 네가 가장 가까이하는 모든 것에서, 이 둘을 마음에 떠올려라. 그리고 모든 것이 바로 그들이라고 생각하고, 위의 것들이나 아래의 것들, 신적인 것들이나 변화를 겪는 것들, 혹은 어둠 속에 있는 것들에 대해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말라. 모든 것은 이 둘, 즉 제작자와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작자’가 ‘만들어진 것’ 없이 존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 각각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자아가 자아로부터 분리되는 것보다 더 불가능하다.
6. 이제 만일 제작자가 만드는 그것(That which makes)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며, 홀로이고, 단순하며, 비합성된 존재라면, 그는 필히 이 만듦을 자기 자신에게 행해야 한다. 그에게 있어 그의 제작자의 만듦은 ‘그의 만들어짐’이 된다. 그리고 만들어지고 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는, 그것은 그 자신에 의해 만들어짐으로써 그렇게 만들어질 수 없다. 그것은 필히 다른 이에 의해 만들어짐으로써 만들어져야 한다. ‘제작자’ 없이는 ‘만들어진 것’은 만들어지지도 존재하지도 않으니,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저 다른 것의 박탈로 인해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잃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므로, 모든 것이 둘, 즉 ‘만들어지고 있는 그것’과 ‘만드는 그것’으로 인정되었다면, 모든 것은 이들의 결합 안에서 하나이니, 곧 ‘인도하는 그것’과 ‘따르는 그것’이다. 만드시는 신은 ‘인도하는 그것’이며, ‘만들어지고 있는 그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따르는 그것’이다.
7. 그리고 너는 만들어진 것들의 다양성 때문에, 신께 낮은 지위와 영광의 결핍을 돌릴까 두려워하여 그것들을 꺼리지 말라. 그의 영광은 하나이니, 곧 만물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말하자면 신의 육체(God's Body)이며, 그것들의 만듦이다. 그러나 제작자 자신에 의해서는 어떤 악하거나 저급한 것도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만드는 과정을 동반하는 정념들이니, 마치 녹이 놋쇠에, 오물이 육체에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놋쇠 대장장이가 녹을 만들지 않으며, 육체의 부모가 오물을 만들지 않고, 신께서 악을 만들지 않으신다. 그것들을, 말하자면, 그 생기를 잃게 만드는 것은 만들어지는 상태에의 지속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신께서는 변화를 만드셨으니, 말하자면 발생(genesis)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으로서이다.
8. 그렇다면 한 명의 동일한 화가가 하늘과 신들, 땅과 바다, 인간과 모든 동물들, 그리고 무생물과 나무들을 모두 만드는 것이 가능하면서도, 신께서 만물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인가? 이 얼마나 괴물 같은 이해의 결핍이며, 신에 대한 지식의 결여인가! 그러한 자들은 모든 이들 중 가장 기이한 운명을 겪으니, 그들은 경건하게 숭배하고 신의 찬미를 노래한다고 말하면서도, 그에게 만물의 만드심을 돌리지 않음으로써 신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알지-못함에 더하여, 그들은 그에게 정념이나 오만, 혹은 무능을 돌림으로써 그에 대한 최악의 불경죄까지 저지른다. 만일 그가 만물을 만들지 않으신다면, 오만 때문에 만들지 않으시거나, 혹은 능력이 없어서 만들지 않으시는 것이니, 이는 불경한 생각이다.
9. 신께는 오직 하나의 정념(Passion)만이 있으니, 곧 선(Good)이다. 그리고 선하신 분은 오만하지도 무능하지도 않으시다. 이것이 신, 곧 선이시니, 만물을 만들 모든 힘을 가지셨다. 그리고 만들어질 수 있는 모든 것은 신에 의해, 즉 선이시며 만물을 만드실 수 있는 그분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나 네가 그가 어떻게 만드시는지, 그리고 만들어진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배우고자 한다면, 그리할 수 있다.
10. 매우 아름답고 가장 닮은 이미지를 보아라. 한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니, 여기에는 밀을, 저기에는 보리를, 그리고 저기에는 다시 다른 씨앗들을! 하나의 동일한 사람이 포도나무와 사과나무, 그리고 다른 모든 나무들을 심는 것을 보아라! 바로 같은 방식으로 신께서는 하늘에 불멸(Immortality)을, 땅에 변화(Change)를, 그리고 우주에 생명(Life)과 운동(Motion)을 씨 뿌리신다. 이것들은 많지 않고, 적으며 세기 쉽다. 모두 넷이며, 그들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있는 신 자신과 발생(Genesis)이다.
「세 번 위대하신 헤르메스가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보내는 서신」 주해
더 높은 이해를 위한 신비의 요약
열네 번째 논고는 헤르메스가 그의 나이 들고 지혜로운 제자, 아스클레피오스를 위해 특별히 저술한 서신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헤르메스는 이 글이 이전에 아들 타트에게 했던 가르침의 “요약본”이지만, 동시에 “더 신비롭게 설명”될 것이라고 밝힙니다. 이는 이 텍스트가 초심자를 위한 안내서가 아니라,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오른 구도자의 이해를 한 차원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쓰인, 정수(精髓) 중의 정수임을 의미합니다. 이 서신의 핵심 주제는,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보이지 않는 제작자(Unseen Maker)’와 그에 의해 만들어진 ‘보이는 세계(Made World)’ 사이의 절대적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는 관계를 규명하는 것입니다. 헤르메스는 이 관계의 신비를 통해, 창조와 악의 문제, 그리고 신의 본질에 대한 가장 깊은 통찰을 제시합니다.
보이지 않는 제작자와 그의 육체
서신의 첫 번째 논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을 연상시키는 엄격한 논리를 통해 ‘만들어지지 않은 제작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만일 드러난 모든 것들이 과거에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만들어진 것들은 그들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이들을 만드는 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만들어진 것들의 원인이 되는 이 제작자는, 필연적으로 그 자신은 “만들어질 수 없으며”, 모든 피조물보다 “더 오래”된 존재여야 합니다.
그러나 헤르메스는 이 논증을 통해, 신의 가장 심오한 역설 중 하나를 드러냅니다. 바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은 보이지만, 그는 보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신은 보이지 않습니까? 헤르메스는 그 이유가 “그가 만드시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즉, 신의 끊임없는 창조 행위 그 자체가, 오히려 그의 본질을 가리는 거대한 장막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인 이 광대한 우주에 너무나 압도된 나머지, 그 배후에 있는 예술가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나무들을 보느라 숲 전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신의 현존은 그의 부재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가장 완벽하고도 전면적인 현존(만물 창조)을 통해 역설적으로 감추어집니다.
더 나아가, 헤르메스는 이 창조 행위, 즉 “만물을 만드는 것”이 바로 “신의 영광”이며, “말하자면 신의 육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우주를 ‘보이는 신’으로 묘사한 것과 맥을 같이하는 범재신론적(panentheistic) 통찰입니다. 이 세계는 신과 분리된 저급한 피조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살아있는 몸이며, 그의 영광이 현현한 결과물입니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몸을 대하듯 경외와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분리될 수 없는 이원성: 권능, 에너지, 그리고 선
보이지 않는 제작자는 어떤 본질을 가졌습니까? 헤르메스는 그에게 세 가지 이름, 즉 “그의 권능(Power)을 위해서는 신이라, 그의 에너지(Energy)를 위해서는 제작자라, 그의 선(Good)을 위해서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권능(dynamis)’은 아직 발현되지 않은 잠재적인 힘을, ‘에너지(energeia)’는 그 힘이 실제로 작용하여 창조 행위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본성이 바로 ‘선(Good)’입니다.
이 논고의 핵심 주장은, 실재 전체가 이 “둘, 즉 제작자와 만들어진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이 세상을 창조한 뒤 멀리서 방관하는 이신론적(deistic) 신관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제작자와 만들어진 것은 “자아가 자아로부터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통일체입니다. 더 나아가, 헤르메스는 “제작자의 만듦은 그의 만들어짐이다”라는 가장 난해한 형이상학적 명제를 제시합니다. 이는 신의 ‘존재(being)’와 그의 ‘행위(doing)’가 분리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신은 존재하는 동시에 창조하며, 그의 존재 자체가 곧 영원하고도 끊임없는 창조 행위인 것입니다.
불완전함의 문제: 놋쇠의 녹
만일 선하신 신이 만물을 창조했고, 그 세계가 곧 신의 몸이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과 불완전함,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헤르메스는 이 신정론(theodicy)의 난제에 대해, ‘놋쇠의 녹’이라는 강력하고도 명쾌한 비유로 답합니다.
“제작자 자신에 의해서는 어떤 악하거나 저급한 것도 생각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들은 만드는 과정을 동반하는 정념들이니, 마치 녹이 놋쇠에, 오물이 육체에 그러하듯 말이다. 그러나 놋쇠 대장장이가 녹을 만들지 않으며, 육체의 부모가 오물을 만들지 않고, 신께서 악을 만들지 않으신다.”
이것은 악이 신에 의해 창조된 적극적인 실체가 아니라, 물질세계의 생성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결핍’ 혹은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신플라톤주의적 해결책입니다. 대장장이는 완벽한 칼을 만들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쇠가 공기와 만나 녹이 스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그 녹은 대장장이의 ‘작품’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은 오직 선만을 창조하지만, 그 선이 물질이라는 제약 속에서 현현하는 과정에서 불완전함과 악처럼 보이는 ‘정념들’이 동반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영지주의자들이 물질세계 자체를 악으로 규정한 것과 달리, 헤르메스주의는 세계 자체는 선하지만(신의 몸),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생성의 과정이 불완전함을 낳는다고 보는, 훨씬 더 미묘하고 긍정적인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신이 이 불완전함을 해결하기 위해 만드신 것이 바로 ‘변화(change)’이며, 이는 “발생(genesis)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입니다. 즉, 죽음과 변화의 순환은 비극이 아니라, 녹을 제거하고 놋쇠를 다시 빛나게 하려는 신성한 정화 과정인 것입니다.
불멸을 씨 뿌리는 자
서신은 신을 “씨 뿌리는 자(sower)”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마무리됩니다. 신은 하나의 동일한 창조 행위를 통해, 서로 다른 영역에 서로 다른 씨앗을 뿌리십니다. “하늘에는 불멸을, 땅에는 변화를, 그리고 우주에는 생명과 운동을.” 이 이미지는 이 논고의 모든 가르침을 하나로 종합합니다. 우리의 지상적 삶이 비록 ‘변화’와 소멸의 법칙 아래 놓여 있을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더 큰 우주적 ‘생명과 운동’의 일부이며, 그 너머에는 ‘불멸’의 하늘이 존재합니다. 이 모든 다른 차원들은 결국 하나의 씨 뿌리는 자, 즉 선하신 아버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 서신은 우리에게, 눈에 보이는 세계의 불완전함과 변화에 절망하지 말고, 그 모든 것의 배후에서 영원한 생명과 불멸을 씨 뿌리고 있는 보이지 않는 제작자의 선한 의지를 신뢰하라고 가르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