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프리메이슨의 핵심 철학

by DrLeeHC

제2부: 프리메이슨의 철학과 에소테리즘


제4장: 프리메이슨의 핵심 철학


4.1 형제애, 진리, 관용의 원칙


프리메이슨이라는 신비로운 이름 뒤에는 수많은 의례와 상징, 그리고 복잡한 등급 체계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다채로운 장식들을 걷어내고 그 가장 중심부로 들어갈 때, 우리는 이 거대한 정신적 건축물이 실은 놀라울 정도로 단순하고도 견고한 세 개의 기둥 위에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기둥의 이름은 바로 '형제애 (Brotherly Love)', '구제 (Relief)', 그리고 '진리 (Truth)'입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은 프리메이슨이 되기 위한 서약의 핵심이자, 그들이 평생에 걸쳐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삶의 나침반입니다. 이것은 단지 아름다운 단어의 나열이 아니라, 한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다듬어 가는 구체적인 '작업 도구'이며, 이 도구들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프리메이슨 철학의 성소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기둥은 형제애입니다. 프리메이슨에게 형제애는 단순히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의 친목이나 동료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국적, 인종, 종교, 사회적 지위 등 세상이 만들어 놓은 모든 인위적인 장벽을 넘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신성(神性)의 불꽃을 발견하고 존중하겠다는 의식적인 결단입니다. 로지 안에서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동등하게 만나 서로를 '형제'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철학의 실천적 표현입니다. 그들은 석공의 도구인 '수평기 (Level)'를 들어 보이며, 우리 모두는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 앞에서 평등한 존재임을 배웁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로지의 문밖에서도 이어져야만 합니다. 현대 사회가 정치적 이념과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에 의해 갈수록 분열되고 파편화되어 가는 지금,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을 적으로 규정하는 대신, 그를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고 이해하려는 형제애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은 울림을 줍니다.


두 번째 기둥은 구제, 즉 자선입니다. 만약 형제애가 마음속의 따뜻한 감정이라면, 구제는 그 감정을 현실 세계에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에게 자선은 선택이 아닌 의무이며, 형제애의 가장 진실한 표현입니다. 이 구제의 첫 번째 대상은 물론 어려움에 처한 동료 프리메이슨과 그의 가족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자비는 결코 로지의 벽 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슈라이너스 아동 병원'과 같은 거대한 자선 사업을 통해, 그들의 구제 활동이 어떻게 사회 전체를 향해 펼쳐지는지를 목격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또 다른 석공의 도구인 '흙손 (Trowel)'을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흙손이 각각의 돌멩이들을 단단히 결합시키는 시멘트를 펴 바르는 도구이듯이, 구제라는 행위는 흩어진 개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주고 사회 전체의 구조를 더욱 튼튼하게 만드는 사랑의 시멘트라고 그들은 가르칩니다. 고통받는 이의 눈물을 닦아주는 행위야말로, 보이지 않는 인류의 신전을 짓는 가장 신성한 노동인 것입니다.


세 번째 기둥은 바로 진리입니다. 이 개념은 앞의 두 기둥보다 훨씬 더 깊고 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특정 종교가 제시하는 교리나, 누군가에 의해 주입되는 고정불변의 신념 체계가 결코 아닙니다. 프리메이슨에게 진리는 끝없는 '탐구의 과정' 그 자체입니다. 프리메이슨은 답을 직접 주는 대신, 상징과 알레고리, 그리고 철학적 담론이라는 도구를 제공할 뿐입니다. 각 회원은 이 도구들을 사용하여 자신만의 진리를 스스로 발견해 나가야만 합니다. 이 진리의 탐구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집니다. 하나는 '도덕적 진리'로서,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정직하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며, 올곧고 성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석공의 도구인 '수직선 (Plumb)'이 건물이 똑바로 서도록 하듯이, 도덕적 진리는 한 인간의 인격이 흔들림 없이 바로 서도록 하는 기준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지성적 진리'로서, 자기 자신과 우주, 그리고 신성의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며 무지(無知)의 어둠에서 벗어나 더 큰 '빛 (Light)'으로 나아가려는 열망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형제애, 구제, 진리라는 세 개의 기둥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이룹니다. 형제애는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이며, 구제는 그 태도를 세상에 실천하는 행동 양식이고, 진리는 그 모든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이자 방향이 됩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이야말로, 수많은 오해와 신비의 장막 뒤에 가려진 프리메이슨 철학의 가장 순수하고도 본질적인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 핵심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앞으로 탐험하게 될 더욱 깊고 복잡한 에소테리즘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 과정이 될 것입니다.


4.2 "최고 건축자" 개념의 기원


프리메이슨의 철학을 탐구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그리고 가장 깊은 호기심을 느끼게 되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 (The Great Architect of the Universe)'라는 독특한 호칭일 것입니다. 프리메이슨은 그들의 모든 의식과 기도를 바로 이 '위대한 건축가'에게 바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근본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왜 그들은 그저 단순하게 '신(God)'이라 말하지 않고, 이토록 장엄하고도 철학적인 호칭을 고집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은, 프리메이슨이라는 현상의 가장 깊은 심장부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 개념의 뿌리를 찾기 위한 여정은, 우리가 이미 거닐었던 중세 석공 길드의 작업장으로 다시 한번 우리를 이끕니다. 망치와 끌을 든 중세의 석공들에게, 자신들의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신의 영광을 돌 위에 새기는 신성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들의 눈에, 저 하늘의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의 질서정연한 운행은 신성한 기하학의 증거였으며, 자신들이 짓는 대성당은 바로 그 거대한 우주적 질서의 축소판, 즉 지상에 구현된 소우주 (Microcosm)였습니다. 신은 하늘의 건축가였고, 그들은 그 위대한 작업을 지상에서 모방하는 겸손한 대리인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창조주로서의 신'을 '건축가'라는 이미지로 이해하는 사유의 원형은, 이미 그들의 땀과 신앙 속에 깊이 배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형적인 이미지가 하나의 확고한 '철학적 원칙'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특별한 지적 토양 위에서였습니다.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이후, 우주는 더 이상 변덕스러운 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신비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하고도 합리적인 법칙에 따라 운행되는 거대한 기계 장치와도 같았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정신 속에서, 신은 더 이상 인간사에 일일이 개입하여 기적을 행하는 인격적인 주관자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우주라는 거대하고도 정교한 시계를 완벽한 물리 법칙에 따라 만들어낸 뒤, 그 시계가 스스로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놓아두는 '위대한 시계공 (Great Clockmaker)'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건축가'라는 개념은 바로 이 이성적이고도 질서정연한 창조주의 이미지를 담아내기에 가장 완벽한 비유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개념이 프리메이슨의 핵심 원리로 공식화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1717년 그랜드 로지의 설립과 함께 찾아왔습니다. 당시 설립자들이 마주한 가장 큰 과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종교 전쟁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의 형제애 아래 묶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만약 프리메이슨이 '예수'나 '야훼'와 같은 특정 종교의 신을 믿어야만 가입할 수 있는 단체였다면, 그들은 결코 종교의 벽을 넘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라는 개념은, 실로 천재적인 외교적, 철학적 해법으로 그 빛을 발합니다. 이 호칭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이 건축가를 성부(聖父) 하나님으로, 유대인은 야훼로, 무슬림은 알라로, 그리고 이신론자(Deist)는 우주를 창조한 이성적 원리로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이 요구하는 유일한 조건은, 이 우주가 혼돈스러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어떤 지성적이고도 신성한 원리에 의해 설계되고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뿐입니다.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라는 개념은 특정 신에 대한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형제들이 각자의 신앙을 존중하면서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철학적 광장을 마련해주는 '신성한 빈 그릇'과도 같습니다. 이 그릇 안에 무엇을 채울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양심에 맡겨져 있습니다. 이 놀라운 관용의 원칙이야말로, 프리메이슨이 종교적 배타주의의 시대를 넘어, 보편적 형제애라는 새로운 이상을 실현할 수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주춧돌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위대한 관용의 원칙이 낳은 ‘신성한 모호성’이, 훗날 프리메이슨을 향한 가장 치명적인 오해의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프리메이슨의 비판자들, 특히 고대의 이단(異端) 사상에 정통했던 일부 신학자들의 눈에, 프리메이슨의 '건축가'는 정통 기독교의 전지전능한 창조주와는 전혀 다른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건축가는, 바로 2세기 영지주의 (Gnosticism)자들이 '데미우르고스(Demiurge)'라 불렀던 저 불완전하고도 오만한 '하위 창조주'의 그림자와 섬뜩할 정도로 겹쳐 보였던 것입니다.


영지주의 신화 속에서, 데미우르고스는 참되고 궁극적인 신, 즉 빛의 세계에 존재하는 '알려지지 않은 아버지'로부터 유출된 하위의 영적 존재입니다. 그는 자신이 유일한 신이라는 무지(無知)와 오만 속에서, 영적인 빛과 어두운 물질이 뒤섞인 이 불완전한 물질 세계를 창조한 장인(匠人)에 불과합니다. 영지주의자들에게 데미우르고스는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영혼을 물질세계라는 감옥에 가두어 놓은 간수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구약성서에 묘사된, 질투하고 분노하며 율법을 강요하는 신, 야훼가 바로 데미우르고스의 대표적인 이미지였습니다.


이제 이 두 개념 사이의 치명적인 유사성과 결정적인 차이점이 보이십니까? 프리메이슨의 비판자들은 이 두 이미지를 교묘하게 겹쳐 놓습니다. 그들은 "보라! 프리메이슨들이 숭배하는 '건축가'는 바로 영지주의 이단들이 말했던 저 저급한 데미우르고스다. 그들은 우주의 진정한 신을 부정하고, 물질 세계를 창조한 악한 존재를 숭배하고 있다!"라고 외칩니다. 프리메이슨이 내세운 '관용'은 진정한 신을 모독하기 위한 위장이 되며, 그들의 '비밀주의'는 바로 이 끔찍한 이단 사상을 숨기기 위한 장막으로 오해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도적인 왜곡이거나, 혹은 심각한 철학적 무지에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프리메이슨의 '위대한 건축가'는 결코 숭배의 대상 자체를 한정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 모든 신앙을 담을 수 있는 '열린 그릇'입니다. 프리메이슨 회원 대다수는 전통적인 기독교인으로서, 그들의 건축가는 곧 성부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영지주의의 데미우르고스는 그 자체로 '불완전하고 무지한 하위 창조주'라는 명확하고도 부정적인 속성을 지닌 특정 존재입니다. 프리메이슨의 개념이 '포용성'을 그 본질로 한다면, 데미우르고스의 개념은 '결핍'과 '한계'를 그 본질로 합니다.


이처럼, 프리메이슨의 가장 위대한 철학적 발명품이었던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라는 개념은, 그 관용의 정신 때문에 오히려 가장 사악한 이단 숭배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게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겪게 된 것입니다. 이 오해의 실타래를 푸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프리메이슨이라는 현상을 둘러싼 겹겹의 편견을 걷어내고 그 본래의 얼굴을 마주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과제라 할 수 있습니다.


4.3 계몽주의와 프리메이슨의 사상적 연결


우리가 프리메이슨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들이 태동하고 성장했던 시대의 정신, 즉 18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계몽주의 (The Enlightenment)'라는 거대한 빛의 파도와 마주하게 됩니다. 프리메이슨이 계몽주의의 직접적인 산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 두 지적 흐름은 마치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서로의 모습을 비추며 자라난 쌍둥이와도 같이, 너무나도 깊고 운명적인 사상적 공명을 나누고 있습니다. 프리메이슨 로지는 바로 이 계몽주의의 가장 급진적이고도 이상적인 사상들이, 책 속에 잠들어 있는 이론을 넘어 살아 숨 쉬는 현실이 될 수 있었던 '사회적 실험실' 그 자체였습니다.


첫째, 계몽주의의 가장 핵심적인 신념은 바로 '이성(Reason)의 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었습니다. 볼테르, 디드로, 로크와 같은 계몽 사상가들은 인간이 더 이상 낡은 권위나 맹목적인 미신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여 우주와 사회의 원리를 이해하고 개선해 나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바로 이 시대정신이 프리메이슨의 철학과 완벽하게 조응했습니다. 프리메이슨 의식에서 후보자가 '어둠'에서 '빛'으로 인도되는 과정은, 무지와 편견의 상태에서 벗어나 이성의 깨우침을 얻는 계몽주의의 이상을 그대로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기하학'을 신성한 학문으로 숭배하고,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를 합리적인 설계자로 묘사한 것 역시, 뉴턴이 밝혀낸 질서정연한 우주관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로지는 회원들에게 감정과 열정을 이성으로 다스리고, 모든 문제를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해결하도록 가르치는 이성의 훈련장이었습니다.


둘째, 계몽주의는 '관용(Tolerance)'이라는 새로운 도덕률을 제시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유럽을 피로 물들였던 종교 전쟁에 대한 뼈아픈 반성 속에서, 계몽 사상가들은 개인의 양심과 신앙의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리메이슨 로지는 바로 이 관용의 정신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가장 비옥한 토양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라는 개념은 서로 다른 종파에 속한 사람들이 종교적 논쟁 없이도 하나의 형제애 아래 모일 수 있게 한 놀라운 발명품이었습니다. 로지 안에서는 가톨릭 신자와 개신교 신자가, 귀족과 부르주아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실로 급진적인 사회적 실험이었습니다. 프리메이슨은 관용을 단지 아름다운 이상으로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로지라는 구체적인 공간 안에서 그것을 일상의 실천으로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셋째, 계몽주의는 인류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진보(Progress)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그 특징으로 합니다. 인간은 교육과 이성의 힘을 통해 무한히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으며, 사회 역시 더 나은 방향으로 개혁될 수 있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이 사상은 프리메이슨의 핵심적인 상징인 '거친 돌(Rough Ashlar)'과 '완벽한 돌(Perfect Ashlar)'의 비유 속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불완전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돌'과 같지만, 교육과 도덕적 수양이라는 '망치와 끌'을 통해 스스로를 깎고 다듬어, 사회의 주춧돌이 될 수 있는 '완벽한 돌'로 거듭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프리메이슨 로지는 바로 이 자기 완성을 위한 작업장이었습니다. 그들은 더 나은 개인들이 모일 때, 비로소 더 나은 사회라는 위대한 신전이 지어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처럼 프리메이슨과 계몽주의는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고받는 공생 관계였습니다. 계몽주의가 프리메이슨에게 그 철학적 깊이와 시대적 정당성을 부여했다면, 프리메이슨은 계몽주의에게 그 추상적인 이상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고 확산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조직과 네트워크를 제공했습니다. 로지는 단순한 비밀 결사가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꿈꾸던 이들이 모여 미래를 설계하고, 그 미래를 살아갈 시민으로서의 덕성을 함양하던 '새 시대의 인큐베이터'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구체제를 비판하고 인간 이성의 해방을 추구했던 바로 이 계몽주의와의 깊은 사상적 연결 때문에, 프리메이슨은 곧이어 닥쳐올 혁명의 시대 속에서 '기존 질서를 파괴하려는 음모가'라는 치명적인 오해를 뒤집어쓰게 될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4.4 도덕적 자기계발의 철학


우리는 지금까지 프리메이슨의 핵심적인 철학, 즉 형제애와 구제, 진리라는 세 가지 원칙과, '우주의 위대한 건축가'라는 독특한 신(神) 개념, 그리고 계몽주의와의 깊은 사상적 연결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거대하고 숭고한 이념들이, 로지 안의 한 평범한 개인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오며, 그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도록 요구하는지를 물어야만 합니다. 그 대답은 프리메이슨 철학의 가장 아름답고도 실천적인 비유, 바로 '거친 돌'을 '완벽한 돌'로 다듬어가는 과정 속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프리메이슨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세상에 태어날 때 하나의 '거친 돌 (The Rough Ashlar)'과 같습니다. 그것은 숲속 채석장에서 막 캐낸, 어떤 형태도 갖추지 못한 원석입니다. 이 돌은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과 편견, 그리고 무지라는 거친 표면으로 뒤덮여 있습니다. 이 상태 그대로는 어떤 위대한 건축물에도 사용될 수 없는, 그저 미완의 존재일 뿐입니다. 프리메이슨의 여정은 바로 이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스스로를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어가겠다는 결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이 거친 돌을 어떻게 다듬을 수 있겠습니까? 프리메이슨은 그 해답을 그들의 선배였던 중세 석공들이 사용했던 '작업 도구 (Working Tools)'의 상징적 의미 속에서 찾습니다. 로지에서 새로이 형제가 된 이에게는 실제 연장이 아닌, 그 연장에 담긴 도덕적 가르침이 주어집니다. 예를 들어, 거친 돌의 불필요한 부분을 쳐내는 '망치 (Gavel)'는, 우리 내면의 악덕과 나쁜 습관을 과감히 끊어내려는 의지의 힘을 상징합니다. 망치의 힘을 정교하게 인도하는 '끌 (Chisel)'은, 교육과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지성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이 두 도구의 조화는, 맹목적인 의지만으로는 결코 자신을 변화시킬 수 없으며, 반드시 지성적인 깨달음이 함께해야만 한다는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또한, 모든 면을 반듯하게 만드는 '직각자 (Square)'는, 모든 행동을 미덕과 양심의 기준에 맞추어 살아가야 함을 일깨워주는 도덕률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원을 그리는 '컴퍼스 (Compasses)'는, 우리의 불타는 욕망과 열정을 이성의 원 안에서 다스리고 절제하는 지혜를 가르쳐 줍니다. 프리메이슨은 바로 이러한 상징적인 도구들을 사용하여, 평생에 걸쳐 자기 내면의 '거친 돌'을 깎고, 재고, 다듬는 고된 작업을 수행해 나갑니다.


이 기나긴 자기계발의 여정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완벽한 돌 (The Perfect Ashlar)'이 되는 것입니다. 완벽한 돌은 모든 면이 정교하게 다듬어진 완벽한 정육면체의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인격을 갈고닦아, 이성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또 도덕적으로나 균형 잡힌 온전한 인간이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완벽한 돌의 목적은, 그 자체로 아름답게 빛나며 홀로 서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진정한 가치는, 다른 완벽한 돌들과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위대하고도 견고한 건축물의 일부가 되는 데 있습니다.


즉, 프리메이슨이 추구하는 자기계발은 결코 이기적인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노력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더 나은 남편, 더 나은 아버지, 더 나은 친구, 그리고 더 나은 시민이 되어, 인류라는 거대한 신전을 짓는 데 가장 믿음직하고 쓸모 있는 건축 자재가 되기 위함입니다. 나의 완성이 곧 우리 공동체의 완성으로 이어진다는 이 철학이야말로, 프리메이슨의 자기계발론이 지닌 가장 숭고한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로지는 회원들에게 이 위대한 건축 작업에 필요한 설계도와 작업 도구를 제공해주는 '작업장'입니다. 하지만 실제 망치와 끌을 들고, 땀 흘리며 돌을 다듬어야 하는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로지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가정과 직장, 그리고 사회라는 '자신의 삶이라는 채석장'에서 평생에 걸쳐 계속되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끊임없는 도덕적 자기계발을 통해 더 나은 인간을 만들고, 그들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려는 이상이야말로, 프리메이슨 철학의 시작이자 끝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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