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 열매와 무서운 회오리바람
깊고 고요한 숲속, 초록 융단처럼 이끼가 폭신하게 깔린 곳에 꼬마 다람쥐 토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토리의 세상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가장 큰 행복은 숲의 품속에서 단단하고 알찬 ‘진짜 도토리’를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진짜 도토리는 겨울 양식 창고에 차곡차곡 쌓일 때마다 마음을 든든하게 채워주었습니다. 이 작은 열매 하나하나는 배고픔을 달래주고 생명을 이어주는, 숲이 준 선물이었습니다. 토리는 도토리를 모을 때마다 마치 숲과 깊은 대화를 나누는 듯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나무의 속삭임, 바람의 노래, 그리고 흙의 따뜻한 숨결이 그를 감싸며 “너는 이 숲의 소중한 일부란다”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토리의 집은 오래된 떡갈나무의 뿌리 사이에 자리 잡은 아담한 나무 구멍이었습니다. 그곳에는 그가 지난여름부터 정성껏 모아둔 도토리들이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창고 문을 열 때마다 나는 흙내음과 도토리의 고소한 향기는 토리에게 더없는 안도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창고를 들여다보며 생각하곤 했습니다.
“이 도토리들 덕분에 겨울이 와도 배고프지 않을 거야. 친구들과 나누어도 충분할 만큼 많아.”
이런 순간들 속에서 토리는 자신이 숲의 일부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숲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사실을 깊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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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숲에 낯선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그 바람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숲속 광장으로 데려왔습니다. 동물들은 그것을 ‘반짝이 열매’라고 불렀습니다. 반짝이 열매는 먹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묘한 물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침 햇살 아래에서는 다이아몬드처럼, 저녁노을 아래에서는 루비처럼 빛을 뿜어냈습니다. 그 빛은 마치 마법처럼 동물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동물들은 진짜 도토리를 줍던 일을 멈추고 반짝이 열매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숲속 광장은 순식간에 반짝이 열매를 모으는 동물들로 북적였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자신이 모은 열매가 얼마나 더 크고, 얼마나 더 빛나는지 자랑하느라 정신없었습니다.
특히 숲속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멋쟁이 토끼 ‘라라’는 이 새로운 놀이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녀의 집 앞에는 반짝이 열매로 쌓은 화려한 탑이 세워졌습니다. 그 탑에는 희귀한 푸른빛 열매부터 무지갯빛으로 반짝이는 열매까지, 보석상이 부럽지 않을 만큼 눈부신 것들이 가득했습니다. 동물들은 라라의 탑 주위를 맴돌며 감탄을 쏟아냈습니다.
“역시 라라야! 저 완벽한 모습을 봐. 라라처럼 되는 게 우리 모두의 꿈이야!”
다람쥐, 고슴도치, 심지어 느릿느릿 걷는 거북이까지 라라의 탑을 동경하며 자신만의 반짝이 열매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토리는 자신의 창고에 가득한 진짜 도토리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어제까지 그를 그토록 행복하게 해주던 것들이 갑자기 초라하고 볼품없게 느껴졌습니다. 흙이 묻은 도토리의 거친 표면은 라라의 반짝이 열매와 비교하면 너무나 평범해 보였습니다. 토리는 문득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안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도 저 반짝이 열매를 모아야 해. 저 빛나는 탑을 쌓으면, 나도 라라처럼 모두에게 인정받는 멋진 다람쥐가 될 수 있을 거야.”
그 생각은 토리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는 더 이상 도토리를 줍는 일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토리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는 진짜 도토리가 주는 포만감과 든든함을 잊고, 오직 반짝이 열매가 주는 허영의 빛을 좇았습니다.
특히 ‘반짝이는 연못’이라는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그 연못은 신기하게도 물결 하나 없이 맑아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토리는 자신이 찾아낸 가장 아름다운 반짝이 열매를 두 손에 꼭 쥐고 연못에 비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물속의 토리는 현실의 배고프고 부족한 토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짝이 열매와 하나가 되어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모습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이미지는 토리의 가슴을 뛰게 했습니다.
“이게 바로 나야. 이 반짝이는 내가 진짜 나야.”
그는 물속의 자신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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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숲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숲의 모든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나이 많고 지혜로운 부엉이 할아버지가 지켜온 ‘숲의 대헌장’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숲의 모든 동물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기 위한 규칙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겨울의 배고픔을 대비해 반드시 진짜 양식을 모아두어야 한다”,
“모두가 함께 건너는 통나무 다리는 매달 함께 점검해야 한다”
“정해진 오솔길로만 다녀야 길 잃은 아기 동물이 생기지 않는다”
같은 규칙들이었습니다.
이 약속들은 단순한 규칙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혹독한 겨울과 무서운 홍수를 이겨낸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규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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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는 점점 이 약속들이 귀찮고 구시대적인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통나무 다리를 점검하는 시간에 반짝이 열매를 하나라도 더 찾고 싶었고, 정해진 오솔길로만 다니는 것은 답답했습니다. 부엉이 할아버지는 토리에게 ‘어린 묘목들이 잘 자라도록 주변의 잡초를 뽑아주는 역할’을 맡겼지만, 토리는 그 일을 소홀히 했습니다. 묘목 주위의 잡초를 뽑는 대신, 그는 반짝이 열매를 찾아 숲을 헤매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왜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해야 하지? 반짝이 열매를 모으는 게 훨씬 더 재미있고, 모두가 나를 더 멋지다고 생각할 텐데.”
어느 날, 토리는 참다못해 부엉이 할아버지에게 따지듯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왜 아직도 이 낡고 답답한 규칙들을 지켜야 하나요? 보세요, 우리에겐 반짝이 열매가 있어요. 각자 아름다운 열매를 모으며 행복하게 살면 그만 아닐까요? 대헌장 같은 건 이제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부엉이 할아버지는 거대한 참나무 가지 위에서 조용히 토리를 내려다보았습니다.
“토리야, 반짝이는 것은 잠시 눈을 즐겁게 하지만, 그 빛은 네 자신의 것이 아니란다. 반짝이 열매는 너를 비추는 거울일 뿐, 너를 채워주지는 않아. 하지만 이 약속들은 우리 모두를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지켜주는 튼튼한 울타리와 같지. 너에게 맡겨진 ‘묘목 돌보기’라는 역할은, 이 숲의 소중한 일원으로서 너에게 주어진 이름표와도 같단다. 진짜 도토리 한 알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숲 전체를 위한 새로운 나무의 약속을 품고 있단다. 반짝이 열매는 네 눈만 즐겁게 하지만, 진짜 도토리는 네 마음과 숲의 미래를 든든하게 채워준단다.”
토리는 할아버지의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눈에는 낡은 참나무에 새겨진 약속보다, 당장 눈앞에서 반짝이는 열매들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가치 있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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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늦은 오후, 숲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고 차갑게 변했습니다. 나뭇잎들이 불안하게 흔들리며 속삭였고, 새들의 노래가 뚝 끊겼습니다. 평화롭던 숲에 섬뜩한 침묵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이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회오리바람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모든 색과 형태를 지워버리는, 이름 붙일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으아아악!”
동물들의 비명은 굉음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습니다. 토리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달빛을 닮은 반짝이 열매를 품에 꼭 안고 나무집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회오리바람은 토리의 작은 집을 종잇장처럼 흔들었고,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달빛 열매는 순식간에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라라의 화려한 탑도, 다른 동물들의 자랑거리였던 열매 더미들도, 심지어 그들이 매일같이 자신의 모습을 비추던 반짝이는 연못마저 흙탕물 구덩이로 변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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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었습니다. 토리가 덜덜 떨며 나무집 밖으로 나왔을 때, 그가 알던 숲은 그곳에 없었습니다. 나무는 쓰러지고, 오솔길은 막혀 있었습니다. 반짝이 열매로 쌓아올린 자부심도, 누가 더 멋진지를 다투던 경쟁도, 모두 허공 속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바로 그때, 차가운 흙바닥 위에서 아주 작은 아기 토끼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응애, 응애!”
배고픔과 추위에 떨며 서럽게 우는 그 소리는, 그 어떤 말보다도 절박했습니다. 동물들은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반짝이 열매가 사라진 것은 슬펐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배고프고, 다쳤고, 추웠으며, 무엇보다 살아남아야 했습니다.
그 순간, 토리는 자신의 집 깊숙한 곳에 있는 창고를 떠올렸습니다. 귀찮아하면서도, 낡은 규칙이라 비웃으면서도, 부엉이 할아버지의 약속에 따라 마지못해 모아두었던 ‘진짜 도토리’들이었습니다. 토리는 이내 도토리를 작은 수레에 가득 싣고 광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아기 토끼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 도토리 한 알을 건넸습니다. 아기 토끼는 도토리를 받아 입에 넣더니, 배고픔이 가시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토리의 모습을 보고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잊고 있던 창고로 달려가 얼마 안 되는 진짜 양식들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누가 더 반짝이는지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쓰러진 나무들로 막혀버린 오솔길을 뚫기 위해 함께 땀 흘렸고, 다친 친구의 상처를 서로 핥아주었으며, 얼마 없는 음식을 똑같이 나누어 먹었습니다.
토리는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반짝이는 연못에 비친 완벽한 이미지는 무서운 회오리바람 앞에서 속절없이 사라졌지만, 귀찮게만 느껴졌던 숲의 약속과 그 약속에 따라 모아두었던 진짜 도토리가 모두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을.
친구들과 함께 땀 흘려 길을 만들고, 따뜻한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 느끼는 마음의 든든함이야말로, 반짝이 열매 수천 개가 주지 못했던 진짜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숲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으려면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쓰러진 나무를 치우고, 오솔길을 다시 내고, 어린 묘목들이 자라도록 돌봐야 할 테니까요. 하지만 숲속 친구들은 이제 더 이상 헛된 반짝임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흙 묻은 진짜 모습을 바라보고, 서로를 위한 새로운 약속들을 만들어갔습니다.
다람쥐 토리는 오늘도 열심히 진짜 도토리를 모읍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함께 배부른 오늘을 살고, 희망찬 내일을 함께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가끔 반짝이는 연못을 지나칠 때면 물속을 들여다보곤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완벽한 모습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물에 비친 토리는 여전히 흙 묻은 꼬마 다람쥐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 속에는 친구들과 함께 나눈 도토리의 따뜻함, 그리고 숲의 약속을 지키는 든든함이 담겨 있었습니다. 토리는 미소 지으며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나야. 이 숲의 일부인, 진짜 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