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숨지 않아, 나는 원래 빛날 사람이었으니까"
"오늘 신청곡은 <Golden?>
정국이 앨범?"
내가 좋아하는 BTS 정국의
솔로 앨범을 틀어달라는 건가 싶었다.
우리 반엔 항상 칠판 앞에 신청곡 리스트가 적혀 있다.
중간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 듣고 싶은 신청곡 리스트다.
리스트라봐야 별 게 없다.
그저 우리 반 명단 옆에 신청곡과 가수 이름을 적으면 그만이다.
수업이 일찍 끝나거나, 기분이 좋은 날이면
수업 시간에도 가끔 듣곤 한다.
그 날도 수업이 5분 일찍 끝나
노래나 한 곡 들을까 하고 꺼낸 리스트!
한 여학생이 신청한 곡이었다.
"선생님, 요즘 유명한 케데헌 모르세요?"
"잉? 캐데헌이 뭔데? 신조어 뭐 이런 거야?"
아이들이 내 말에 깔깔 웃는다.
"선생님,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고
요즘 넷플릭스 영화 1위하는 애니메이션이에요."
지금이야 '케데헌'을 모를 수가 없지만
당시만 해도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아이들이 틀어달라는 성화에도
잠깐 검열의 시간을 갖는다.
가끔 아이들의 신청곡인데, 내가 모르는 곡 중
욕설이나 비속어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
당황시킨 경우가 있다.
특히 팝송의 경우는 초등학생과 영 맞지 않는 가사인 경우가 많아
멋모르고 틀었다간 낯뜨거운 가사를 마주할 수도 있다.
유튜브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공식 영상을 찾았다.
한글자막을 겸비한.
https://youtu.be/UkFLk0-xf58?si=76340rBnFox0XKTW
I was a ghost, I was alone, hah
- 나는 마치 유령 같았어, 외롭고 보이지 않는 존재였지
어두워진, hah, 앞길 속에 (Ah)
I lived two lives, tried to play both sides
- 두 개의 삶을 살며, 두 얼굴로 살아보려 했지만
But I couldn't find my own place
- 정작 내 자리는 어디인지 몰랐어
한국의 여자 아이돌 그룹을 애니메이션으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 밝고 빠른 화면, 화려한 헌트릭스의 콘서트 장면...
하지만, 그 중 가장 나를 사로잡은 건 가사였다.
우리들도 때론 유령 같이 외롭고 어두운 시간을 지난다.
자신의 약점 때문에 또다른 자아는 자신을 경멸하라고,
감추고, 여러 얼굴로 살라고 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거짓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나 자신조차 속이며 믿지 못한 채...
I'm done hidin', now I'm shinin' like I'm born to be
- 이제 숨지 않아, 난 원래부터 빛나야 할 사람이니까
We dreamin' hard, we came so far, now I believe
- 간절히 꿈꾸고, 여기까지 왔어. 이제 믿어
We're goin' up, up, up, it's our moment
- 우리는 점점 더 높이 올라가,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시간
노래가 고음을 향해 고조되어 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이 정도 영어는 껌이라는 듯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나만 몰랐나?
이럴 땐 소외감이 느껴진다.
사실 아이들도 가사를 다 알진 못한다.
그러니, 후렴구인 "업, 업" 에서 목소리가 커졌다가
다른 가사에는 작아진다. 귀여운 녀석들...
춤까지 아는 아이들은 이미 엉덩이가 들썩 들썩, 손안무를 해가며
근질거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한다.
급기야 몇몇은 일어나 교실 뒤로 가더니
애니메이션의 안무를 똑같이 따라하기에 이른다.
아이들의 떼창에 교실이 들썩거리고
옆반에게 방해되겠다 싶을 즈음
다행히 쉬는 시간 종이 울렸다.
앉아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일어나 화면 앞에서
노래를 따라한다.
교실이 케데헌 콘서트장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아이들이 하교한 후, 고요가 찾아온 순간.
아까 제대로 부르지 못해 속상했던
<Golden>을 틀어본다.
Put these patterns all in the past now
반복된 상처와 틀에서 이제 벗어나
And finally live like the girl they all see
모두가 보는 그 아이처럼, 드디어 나답게 살아
가사가 정말 주옥같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하고 부르기까지 한 '이재'의 인터뷰.
음악 치료사가 꿈이었다는 '이재'의 영상을 보니
가사가 더 잘 와닿았다.
한국 사람들의 압박감, 완벽해야 한다는 착각,
실패해도 괜찮아, 완벽하지 않아도 돼.
그냥 너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자신의 고백이기도 했다는 이 노래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항상 해 주었던 말이기도 했다.
자신의 약점을 받아들이고,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용납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
너는 존재 자체로 빛난다는 말을
이 노래가 해주고 있었다.
조용한 교실, 혼자 노래를 따라해본다.
근데, 이 노래, 너무 높은 거 아니야?
켁켁, 따라하다 목 쉬겠는걸?
“선생님, 전 잘하는 것도 없고, 너무 멍청한 것 같아요.
그냥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요.”
한 여학생이 말했다.
수학을 몹시도 싫어하던 아이.
방과 후, 나와 함께 두 학년 아래 수학을
공부하던 아이였다.
저학년 때는 크게 표나지 않았는데
고학년이 되니, 부족한 수학 실력이 눈에 띄게 두드러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아이는 싫어하는 수학을
집에서 아빠와 매일 하며,
'멍청하다'는 소리를 반복해서 듣고 있었다.
(아이는 이 이야기를 하며, 울먹거렸다.)
그 아이는 한 학기를 '점프업'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수학 보충을 했지만, 크게 점프업되지 못했다.
아이의 재능은 다른 곳에 있었다.
웹툰을 기가 막히게 잘 그렸다.
아이가 그렸다는 그림 파일은
당장 웹툰으로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주인공이 튀어나올 듯 사실적이고 멋졌다.
아이는 1주일에 2시간뿐인
미술 시간을 아쉬워했다.
미술 시간이면
아이는 다른 친구들의 부러움 어린 눈빛을 받으며
자신의 작품을 드러내놓았다.
그나마 초등은 성적으로
아이들을 줄세우지 않기 때문에
미술을 잘 하는 아이, 춤을 잘 추는 아이,
노래를 잘 하는 아이,
수학, 사회, 국어... 각 과목을 잘 하는 아이.
각자의 재능이 빛을 발할 기회가 꽤 있다.
하지만, 고학년으로 갈수록 공부는 어려워지고
따라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수업을 힘들어한다.
나는 항상 고민했다.
아이들의 얼굴만큼 다양한 강점과 고유한 재능을
교실 안에서 키워줄 수 없을까?
모두가 각자의 황금으로 빛나는 교실을 만들 순 없을까?
우리는 여전히 완벽하지 않고
가끔은 무너지고 흔들린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말해주자.
너는 너로서 충분하고,
숨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GOLDEN은
우리 안의 빛을 다시 켜주는 주문 같다.
모두 한 번쯤은 어둠 속에 갇히지만,
결국엔 자기 자신으로 빛나게 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쌤, 목소리가 왜 그러세요?"
아침 조회 때 쇳소리를 내는 나를 향해,
한 여학생이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너네가 알려준 '골든' 연습하다 목이 쉬었어.
음이 너무 높아."
"에휴, 선생님 적당히 하셨어야죠.
쌤이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한번 하면 끝장을 보라고 했지?"
"얘들아, 골든 듣자."
"선생님, 또 골든이에요. 너무 많이 들었어요.
딴 거 들어요."
"안 돼. 샘은 이게 제일 좋아.
지금 딱 처진 너희들한테
꼭 필요한 노래라구.
너희들 안에 있는 공부에 대한 열정을 다시 불태워봐."
"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