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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 Oct 13. 2023

그림자의 존재감

주절거림

1. 집에 오는 길, 가로등에 비친 그림자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그림자 옆에 아주 흐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것만 같은 그림자가 하나 더 있었다. 여태껏 진한 그림자만을 봐왔던 나는 그동안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드디어 그 흐린 그림자의 존재감을 알아차렸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지만, 흐린 그림자는 끝내 사라지지 않고 진한 그림자의 옆에 꼭 달라붙어 함께 나아갔다. 그것에 나는 불현듯 흐린 그림자가 내가 살아갈 수 있게, 내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내 옆에 있어주는 소중한 사람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한그림자의 어둠을 이기지 못해 비록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언제나 진한 그림자의 옆에서 사라지지 않고 진한 그림자를 받쳐주고 있는 흐린 그림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신경을 쓰며 보지 않으면 그것의 존재를 알아차리기란 쉽지 않지만, 흐린 그림자는 언제나 진한 그림자의 옆에 있었고, 그 둘은 언제나 함께였다. 나 또한 그들이 있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비록 익숙한 삶 속에서 그들의 존재를 당연시 여기며, 그들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가지만 그들이 있어 나의 밤이 지속될 수 있었고, 그들이 나를 위해주는 그 수많은  밤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 내가 있을 수 있었다. 이제야 그림자를 통해 그들 덕분에 나의 밤이 이어질 수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2. 그림자는 내가 ‘이상(理想)‘하는 나. 언제나 나를 앞서며 뒤처져 있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럼 나는 그림자만을 바라보며 열심히 달려 그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림자를 추월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러다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아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주변을 살피다 고개를 돌려보면 내 바로 뒤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 모습에 나는 ‘드디어 내가 따라잡은 건가’라는 마음에 뿌듯함과 성취감에 차오르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또 어김없이 나를 앞질러버린다. 내가 잠시라도 삶에 안주하려고 하거나, 마음을 내려놓는 순간 보란 듯이 나를 앞질러 가는 그림자. 그렇게 어느 순간 내게 그림자는 평생을 투닥거리며 싸워나가야 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3. 그림자야말로 나를 배신하지도, 나를 떠나가지도 않을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존재. 언제나 밤만 되면 내 옆으로 다가와 나의 친구가 되어준다. 어두운 밤 집으로 돌아갈 때면, 내가 무섭지 않도록 언제나 나의 말동무가 되어준다. 그러다 주변이 밝아지면 수줍은 그림자는 금방 내 뒤로 숨어버리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불빛이 부끄러워 언제나 밤에만 나타나지만, 나를 떠날 일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것이 서운하지 않다. 내일 밤이 되면 또다시 나의 퇴근길을 밝혀주며 말동무가 되어줄 것을 알기에 헤어짐이 아쉽지도 슬프지도 않다. 이렇게 어느 순간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림자에게 나의 밤을 의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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