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따스했고, 공기는 서늘했다. 9월 그날의 적당한 아침은 영수에게 좋은 기분을 주었다. 영수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으면서 하루를 준비한다. 출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영수는 최근 러시아 문학에 빠져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을 읽고 있었다. 주인공이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어 앞에 나온 등장인물 설명란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읽는다.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 시간을 보니 아직도 출근까지 한 시간 정도가 남았다. 그는 더 이상 집중이 안될 것을 알기에 책을 덮고 출근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짐을 싸고 카페를 나가는 순간. 한 여자가 들어왔다. 파란 머리에 앳된 얼굴이다. 여자는 마치 영수를 아는 듯 눈으로 인사를 하곤 주문을 한다. 영수는 당황해서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다. 이내 무언가 잘못된 듯 뛰어 나갔다. 얼굴이 빨개졌다.
영수는 곰곰이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파란 머리가 일상을 초월한 듯 너무나도 낯설었다. 이내 곧 생각을 지우려고 했다. 그는 생각했다. 괜히 인사했다고. 그는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보조강사일을 시작했다. 학원에 도착한 그는 원장님과 건희한테 인사를 한다. 건희는 영수보다 한 살 위이며 학원에서 일하게 되며 친해졌다. 좋은 대학교에 나온 건희는 일찍이 이 일을 시작했고,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고 있었다. 영수는 그런 건희를 보며 자신도 이 일을 해볼까라는 진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렇게 시간이 남을 때 건희와 이야기하면서 이 일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영수는 오늘도 그런 생각으로 이르게 출근을 했다. 건희는 미리 출근을 해서 당일 수업 준비를 마쳤고 마침 원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건희는 출근한 영수를 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영수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건희는 웃으며 말한다. 원장님은 그런 건희선생님에게 하던 이야기를 마치고 원장실로 갔다. 영수는 건희에게 인사하고 자리로 가 가방을 내려놓는다. “아 영수쌤 조금 일찍 오시지. 방금까지 졸업한 친구가 왔었거든요. 안 그래도 올 초에 영수쌤 딱 처음 왔을 때, 열심히 공부하다가 진로를 바꿔서 그만두었는데. 영수쌤 잘 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 영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가 이 일을 시작한 3월은 정신없이 보냈을 때였다. 누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학생에게도 존댓말을 할 때였다. 한창 원장님과 건희선생님에게 존댓말 하는 걸로 혼나곤 했었다. 그는 중등부를 중심으로 간단하게 영어 단어 테스트를 봐주고 듣기나 문제 풀이에 관해서 채점해주곤 했었다. 그러다가 여름방학부터 한 학교의 중학교 2학년 수업을 맡기 시작했었다. 그즈음에 건희와 친하게 지내면서 조언을 들으며 친해졌다. 건희는 중등과 관련된 수업 자료나 어떻게 학생들을 대해야 하는지를 많이 설명해 주었다. 처음에 영수는 그 조언들이 너무 많아서 어려웠다. 그러나 그 조언들이 영수에게 큰 도움이 돼서 더욱더 건희를 찾게 되었다.
“어떤 학생이죠? 잘 기억이 안 나네요.” 영수는 건희에게 말했다. 건희는 별일 아닌 듯 이야기하며 마쳤다. 건희에게 이런 일은 자주 있었다. 학원을 어떤 이유로 그만두더라도 찾아오는 학생이 많았다. 영수는 그런 건희를 잘 알고 있어 이번에도 같은 일이라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넘겼다. 영수는 건희에게 방금 카페에서 있던 일을 말하려다 바쁘게 일하는 건희를 보고 말았다. 그 역시 자기의 일을 시작했다. 이제 시험 기간 막바지에 다가와서 아이들에게 줄 자료와 마지막으로 해야 할 내용을 정리했다. 내용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문법이 꽤나 자세하게 들어가서 열심히 공부하고 암기하고 있었다.
하루가 다 지나고 모든 수업이 마치자 영수는 지칠 대로 지쳤다. 아직까지 입에 붙지 않은 호칭 때문에 꽤나 곤욕을 치렀다. 문법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막혀 당황한 모습이 보여 부끄러웠다. 건희는 웃으면서 영수에게 다가온다. “오늘도 고생했네.” 건희는 기분 좋은 미소로 말한다. “하~ 오늘 마음 같지 않네요/“ 영수는 쓴웃음을 지며 말했다. 이내 영수가 생각하기에 잘못한 부분을 건희에게 말하면서 조언을 들었다. 건희는 별일 아니라며 그런 상황에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처음에 실수 하나하나가 눈에 보였는데. 그게 아이들이 보기에만 안 그러면 돼. 실수는 생각보다 덜 중요해. 혹시 틀린 부분이 있으면 대수롭지 않게 나중에 고쳐주면 아이들은 잘 몰라.” 건희는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오히려 중요한 건, 선생님의 태도야. 선생님이 기가 죽어버리면 애들은 따라올 사람이 없아. 틀려도 좋으니까. 그 순간엔 당당해져야 해.” 영수는 건희의 말을 듣고 이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를 다시금 떠올렸다.
영수는 부끄러움이 많았다. 처음은 강사 보조라고 생각해서 지원을 했다가 건희의 수업을 듣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원장님은 엄격하긴 하지만 그런 영수를 알아보곤 적극적으로 강사 될 수 있도록 이야기하고 밀어주었다. 영수는 건희의 말에 감명받았다. “자 한 잔 하러 가자고.” 건희는 웃으며 말했다. 영수와 건희는 원장님께 인사하고 근처 호프집에서 술을 마셨다.
영수는 기분 좋게 취하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없는 까만 길을 건너면서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때까지만 해도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주인공 이름이 알료샤인지 알리샤인지를 고민하다가 이내 못 참고 길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펴고 확인했다. 책을 다시 가방에 넣고 일어서서 가려는 순간, 맞은편에 한 커플이 지나갔다. 영수는 그 순간 카페에서 만난 그 여자를 떠올렸다. 파란 머리를 한 여자. 영수는 그 장면을 다시 생각한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거기까지 영수에게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다음이 사실인지 상상인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고 웃으면서 인사를 했는데. 아닌가. 착각인가?’ 영수는 이내 본인이 잘못 착각하고 인사한 것에 부끄러워했다. 그러다가 건희의 조언이 떠올랐다. ‘그래 당당해 저야지.’ 영수는 건희의 조언이 학원 일 뿐 아니라 삶에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이내 부끄러웠던 생각을 정리한다.
날씨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화창했다. 영수는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아니면 실수들이 계속 떠오르는지 어제보다 좋지 않은 기분으로 출근을 했다. 마찬가지로 근처 카페에서 책을 읽는다. 알료샤가 무얼 했는지 찾아가면서 읽다가 도저히 읽히지 않아 책을 덮었다. 지금 출근하면 너무 이른 시간이라 그는 잠시 엎드려서 사람들을 본다. 막상 어제 본 파란 머리의 여자가 오늘도 왔는지를 살펴본다. 30분 정도를 영수는 사람들을 관찰한다. 그는 그 여자가 오기를 바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바라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내 영수는 어제보다 좀 더 일찍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카페를 나가는 순간까지 그 여자를 생각했지만, 어제와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수는 출근하자마자 원장님께 불러갔다. 어제의 실수 때문이지 잔뜩 겁먹었지만 원장님은 다독이기만 했다. ‘그럴 수 있지 뭐. 나도 처음엔 그랬어.’ 원장님의 말에 오히려 더 위축되었다. 하필 그날은 건희도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영수는 혼자서 자책했다. 영수는 괜히 민망해서 수업 준비에 더 몰두했다. 그날 수업은 오히려 더 잘 되었다. 건희의 조언이 중간중간 떠올랐고, 준비한 내용 자체도 영수가 생각하기에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영수는 수업을 다 마치고 강의실에 나왔을 때, 건희가 서있었다. 건희 역시 고등학생 시험일정에 맞춰 학원에서 보충수업을 하려 출근했었다. 영수는 건희와 인사를 했다. 그때 건희 뒤에 그 여자가 서있었다. 파란 머리를 한 여자. “어제 말한 그 학생이에요. 머리를 파랗게 염색해서 저도 처음에 못 알아봤어요.” 건희는 웃으면서 영수에게 말했다. “안녕.. 하세요?” 영수는 어색한 듯 인사했다. 영수는 이네 본인 자리로 돌아가 짐을 싸고 그대로 퇴근했다. “가보겠습니다.” 뒤에선 건희와 그 학생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영수는 애써 무시한다.
밤은 여전히 어두웠다. 영수는 애써 알료샤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맞은편에 술 취한 사람이 지나간다. 비틀비틀거리면서 휘청이는 모습에 영수는 길의 한 구석으로 조용히 걸어간다. 후우- 한숨을 내쉰다. 다시 한 걸음 걷다가 잘못 디뎌 넘어질 뻔했다. ‘차라리 넘어지지.’라고 영수는 생각했다. 달도 뜨지 않는 그런 밤이었다. 모든 화려한 색들은 어둠에 묻힌 그런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