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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담

할아버지, 내 할아버지

by 이공칠

할아버지가 그러더라고 이전에는 누룩뱀이 자주 보였는데, 요새는 자주 보이지 않는다고.


누룩뱀?


응, 갈색 몸통에 검은색이나 다른 색의 줄무늬가 있는 그런 뱀이야. 그렇게 길지는 않고 얼굴이 둥글둥글해서 꽤 귀엽대.


그런데?


응, 할아버지가 예전에 농사지을 땐 각담을 걷어내거나 치우면 누룩뱀이 기어 나온데, 그러면 이제 농사를 시작할 때가 된 거야. 그게 할아버지의 봄이었대. 우리 집은 그렇게 몇 마자기 되는 밭에 감자도 심고, 무우도 심고, 배추도 심고 그랬대.


지금은?


글쎄? 잘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내년엔 농사를 지을런지. 아직 모르겠어. 할머니께선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데. 할아버지가 몇 년 전부터 힘들어서 농사를 하지 않았거든. 그냥 소작을 주고 할아버지는 소일거리만 해서 또 그렇게 몇 년이 지났는데. 이젠 할아버지께서 안 계시니까. 어른들이 알아서 하겄지.


그래 그러겠지. 감자, 무, 배추 재밌네.


어렸을 땐 참 재밌었는데. 가끔씩 시골에 가면 여기선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많이 보고 느낀 거 같아.


재밌었겠다.


응. 살짝 부끄러운 얘기인데. 어렸을 때 시골에는 늘 개를 키웠어. 그리고 여름이 되면 늘 그 개를 잡아먹었지. 지금은 조금 이상하지만, 그 당시에 시골에는 그게 일상이었던 것 같아. 무슨 의식 같은 거지. 여름을 보내는 의식. 시골에서 개를 키울 땐 늘 그 개를 귀여워했어. 막 엄청 잘 만지거나 다루지는 못했는데,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어. 어느 날 할아버지 옆 집에 새끼 강아지를 받게 되었어. 옆 집도 사실 작은할아버지 댁이어서 가끔씩 놀러 갔었거든. 아무튼 나랑 내 동생, 사촌 동생이랑 같이 새끼 강아지랑 같이 막 노는데. 얘가 막 손을 무는 거야. 그런데 이빨이 없으니까. 막 무는데. 그 무는 느낌이 너무 좋은 거야. 강아지도 귀엽고. 그러다가. 그걸 할아버지에게 들켜서 그다음부터는 그냥 멀리서만 보고 그랬지.


왜?


아. 그 무는 습관을 잘못 기르면 강아지가 이빨이 나서도 계속 문데. 그래서 그런 습관을 가지지 말라고 그런 거 같아. 뭐 잘은 모르겠지만.


음. 혹시 개가 물면 아프니까 그런가? 잡아먹으려면 조심해야 하잖아.


음.. 그럴 수도 있겠다. 하..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것도 생각 안 했지. 그냥 할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하니까. 그다음부터 개랑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어. 여름이 쨍해지면, 온 가족이 모이는 거야. 그럼 아빠도 그렇고, 작은 아빠, 고모부들이랑 작은할아버지댁의 남자 친척들이랑 같이 개를 잡았어. 나랑 사촌 동생은 호기심에 구경하고 싶어서 다가가면 아빠가 딱 앞에서 막았지. 멀리서 몽둥이로 툭 치는 소리가 들려. 개는 그럼 몇 번 고통에 끼이-잉 소리를 내는 거야. 이제는 잘 모르겠어. 그 소리가 어떤지. 아무튼 몇 번 그런 개의 소리와 몽둥이 소리가 들리다가 잦아지면, 그다음에는 토치로 태우는 거야. 털을 다 제거하는 거지. 그리고 어느새 시간이 지나면, 고소한 냄새가 올라와. 아빠와 친척들은 몽둥이를 내려놓고, 할아버지는 개를 마저 잡고 일부는 구워 먹고, 나머지는 이제 다 탕으로 해 먹는 거야. 하…


맛있었어?


뭐. 그랬던 거 같아.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막 처음에는 잘 안 먹으려고 했거든. 그런데 너무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거야. 아부지가 되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아들~’하고 부르고 와서 먹으라고 해서 그냥 먹었어. 막 잡기 전까지는 할아버지도 아부지도 엄청 엄한 표정이었거든. 그런데 일이 다 끝나면 다시 원래의 아부지 할아버지로 돌아갔거든. 그럼 나는 안도감을 가지고. 아부지랑, 할아버지랑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무언가를 같이 먹는다는 게 좋았던 거 같아. 또. 더 어린 시절에 할아버지랑 같이 막 걸어서 어딘가로 가고 있었어. 우리 집 밭 지나면 또 작은할아버지집 밭, 또 그 밭 넘어서 아마, 먼 친척정도 되는 거 같아. 할아버지가 무슨 일로 그 집에 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 할아버지들 몇 명이 모여서 불 앞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봤는데 뱀이었어.


뱀? 뱀을 구워 먹은 거야?


음. 그런 거 같기도 하는데 그러면서 기억나는 건 뱀을 구워 먹기보다 술로 담근 게 기억이나. 막 시골 가면 보이는 그런 술통 알지? 거기에 노란색빛 나는 술에 안에는 뱀이 있는 거지. 왜. 그런 농담도 있잖아? 충분히 다 술이 익어서 뚜껑을 열었는데 뱀이 튀어나와 사람을 물어 죽였다고. 물론, 그때 기억은 그냥 할아버지랑 어딜 가다가 뱀술을 담근 걸 본 게 다야.


그게 왜 기억이나?


할아버지가 보통은 혼자 다니셨거든, 농사도 그렇고 막 혼자서 다 하시고 그랬는데. 그날은 내가 심심해 보였는지. 아니면 그 집에 나를 소개하시고 싶었는지. 같이 가자고 하더라고. 나는 좋아서 할아버지랑 같이 갔다가 왔어. 그게 내 여름날이었던 거 같아.


재밌네. 어린 시절엔 그럼 시골에서 살았던 거야?


아니. 시골에서 살지는 않았어. 그냥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이 되면 시골에 놀러 간 거지. 엄마는 한 달 혹은 두 달 동안 나를 돌보기 바쁘고 힘드니까. 시골로 보낸 거고, 나는 시골에 있으면 또 재밌게 놀 수 있으니까 좋았고. 왜 학교에 가면 공부하고 그래야 하잖아. 그런데 시골에 가면 그런 거 없이 눈 뜨면 할아버지, 할머니랑 밥 먹고, 문 열고 나가면 놀 거리도 많으니까. 나무 막대기 하나 아부지가 만들어주고 가면 그거 가지고 사촌동생이랑 칼싸움하고, 뒷 산도 올라가 보고 그런 거지. 할아버지가 장에 가서 고기라도 사 오면 화롯불에 구워 먹고 그런 거지.


재밌었겠네.


응. 할아버지, 할머니 덕분에 정말 재밌었어. 그런데 이제 뭐. 다 끝난 거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니, 내가 다 컸잖아. 그 당시야. 스마트폰 없이 상상만 해도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그러지 않잖아. 한 달 동안 어딘가로 떠난다면, 그거 자체가 이미 마음이 불편해. 돌아와서 해야 할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 차. 오히려 무서워. 가는 것도, 가서 있을 것도, 오는 것도, 모두 다.


그러네.


그렇지. 할아버지가 참 좋은 선물을 주신 거야. 나한테 부끄러운 감정들도 있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그런 기억들로 가득 차. 뭐 토끼고기도 먹어보고, 꿩고기도 먹어보고, 어느 날은 멧돼지가 잡혀서 멧돼지도 고기로 구워 먹어보고 그랬지.


다 먹는 거네?


뭐, 그렇지. 노는 거야. 기억이 잘 안나. 겨울에는 비료 포대 들고 집 바로 뒤에 조그마한 언덕이 있어서 거기서 썰매 타고 놀았거든. 눈이 펑펑 내리면 눈사람 만들고. 겨울에는 할아버지가 농사를 따로 짓지는 않으니까. 할머니는 그래도 주변에 다른 집에서 무슨 소일거리를 하시면, 할아버지는 방 안에서 티브이를 보고 나랑 사촌 동생은 열심히 놀고 돌아다니는 거지. 그런데 이제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까. 아니. 그냥 내가 너무 커버린 거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슬프더라고.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가? 아니 잘 모르겠어. 그게 당연한 건지. 사실 아프다고 하실 때에도 별 느낌이 있지 않았어. 그냥 이젠 내가 다 커버렸으니까. 할아버지가 나이가 드시는 게 눈으로도 보였으니까. 이제는 자주 가진 않았지만, 설날엔 그래도 시골에 내려가면 보이잖아. 몇 년 동안 많이 늙으시고, 또 그러니까 고집이 세지니까. 오히려 나도 더 멀어지더라고. 그렇게 내가 다 컸는데. 그래서 나도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고.


그래서 인가?


응?


아니 요즘 보면 계속 멍한 거 같더라고. 옆에서 말은 듣는 거 같은데 반응이 크질 않고, 몇 번 되물어야 그제야 대답하고.


그랬어?


응. 그랬어.


그렇구나. 할아버지가 없으니까. 그 시절 기억들도 뭔가 같이 사라지는 거 같아. 아니 기억하려고 하면, 무언가 이질감이 들어. ‘내가 정말 겪었던 일들인가?’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네. 겨울에 나랑 사촌동생이랑 같이 있었어. 막 신나게 놀다가 나 혼자 집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지. 동생은 막 문을 두드리면서 소리치고. 그러다가 세게 꽝- 하고 문을 치니까. 문이 깨지더라고. 유리로 된 문이었거든. 할아버지가 놀라서 나왔어. 나는 할아버지에게 죄송하다고 하면서 바로 문 열고 사촌 동생이랑 같이 어쩔 줄 모르는 채 있었지. 그리곤 할머니가 소일거리를 하고 마치고 올 때까지 거실에서 둘이 무릎 꿇고 있었어. 할아버지는 괜찮다고 괜찮다고 하는데. 할머니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거야. 할머니가 오고 막 우리를 혼내는데 할아버지는 옆에서도 계속 괜찮다고 괜찮다고 했어. 우리 할아버지는 그랬어. 아마 지금도 마찬가지일 거야. 괜찮아. 괜찮아. 그러실 거야.


응. 그러실 거야.


그게 지금 생각나는 겨울이야. 잘 모르겠어. 할아버지가 떠나고 맞는 첫겨울인데. 당장 다가올 내년 설에는 무얼 할까? 아버지가 제사는 제대로 지내실 수 있을까? 시골집은 언제까지 그대로 있을까? 정말 괜찮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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