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도 책임도 나의 몫
캐나다에 온 지 채 일 년이 안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 한 컬리지의 유아교육과(Early Childhood Education)에서 공부를 하던 나는 그 학기의 이론 공부를 마치고 캐나다의 한 daycare(유아원)로 첫 현장 실습을 나가게 되었다. 이론 과정을 나름 즐기며 공부했던 나였지만, 실습기간이 다가오자 한국에서의 긴 교사 경력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초중고, 대학교까지 졸업한 내가 캐나다의 교육현장에 대해서 아는 거라곤 책에서 배운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현장에 투입되자 한국이나 캐나다나 아이들은 변함없이 사랑스러웠지만, 예상했던 대로 한국과 캐나다의 교육 현장은 많은 점에서 달랐다. 한국에서는 선생님인 내가 주로 앞에서 리드를 하고 아이들은 내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오는 방식이었다면, 캐나다의 교육 방식은 선생님이 환경을 세팅한 후 한 걸음 뒤로 빠져서 지켜보는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선생님들의 업무 중에 가장 큰 부분은 아이들이 여러 영역에서 발달할 수 있도록 장, 단기 계획을 짜고, 알맞은 활동과 함께 커리큘럼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커리큘럼이 정해지면, 선생님들은 아이들이 등교하기 전 몇 개의 놀이 테이블에 활동 재료(activity materials)를 세팅해 놓는다. 그러면 아이들은 등교해서 가방과 겉옷을 벗어놓고 선생님과 둥글게 앉아 아침 인사겸 대화를 조금 한 후, 세팅되어있는 놀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놀기 시작한다.
뼛속까지 한국 사람인 나는 이때 선생님의 역할이 참 신선한 경험이었다. 아이들이 돌아다니며 놀기 시작하면 선생님의 주 업무는 지켜보는 일(관찰하는 일)이 된다. 미리 세팅해 놓은 활동이 무얼 어떻게 하는 거라는 설명도 아이가 물어보지 않는 한 선생님이 먼저 해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선생님이 이미 의도한 방식대로 그 놀이학습을 수행하지만, 늘 그렇듯 창의적으로 예외를 만드는 아이들이 있다. 어떤 아이들은 선생님이 세팅해 놓은 낱말 블록으로 탑을 쌓으며 놀고, 어떤 아이들은 만들기 재료로 인형극을 하고 놀며, 어떤 아이들은 그냥 한쪽 구석에 앉아 하루 종일 책을 읽기도 한다.
선생님들은 돌아다니며 질문에 답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보드게임하듯이 놀이학습을 하고, 소외된 아이를 자연스럽게 그룹에 속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하지만 아이가 선생님이 의도한 바와 다른 방향으로 활동학습 재료를 사용한다고 해서 혼이나 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런 아이를 관찰하며 그 아이에게 필요한 다음 발달단계에 맞는 커리큘럼을 생각할 뿐이다. 선생님이 길을 펼쳐 놓았다고 해서 꼭 그 길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이는 그날 하루 자신이 갈 길을 자기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런 하루가 쌓여간다.
캐나다, 온타리오주는 JK(Junior Kindergarten, 만 4세)부터 Elementary School(초등학교)로 인정되고 각자 학교에 도시락을 싸오지만, Preschool(유아원)까지는 급식이 제공된다. 그날의 간식 메뉴가 시리얼이었던 어느 날, 교실로 배달된 급식 트레이를 보니 일반 우유와 쌀 우유 그리고 두 종류의 시리얼(콘팝Corn Pop과 치리오 Cheerios)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내 선생님은 간식 먹을 준비를 하고 앉아있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나눠주며 한 명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Would you like some milk? Homo milk or rice milk?"(우유 마실래? 그냥 우유 마실래, 쌀 우유 마실래?) 그리고 아이들이 우유를 결정해서 말하면 또 이렇게 묻는 것이다. "Would you like Corn Pops or Cheerios?"(콘팝 먹을래, 치리오 먹을래?) 그다음은 "Would you like to have the cereal with milk or separately?"(시리얼을 우유에 말아먹을래, 따로 먹을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일까? 순간 멍한 건 또다시 뼛속 한국인인 나뿐인 듯했다. 어떤 아이는 일반 우유에 콘팝을 섞어 달라고 하고, 어떤 아이는 치리오와 쌀 우유를 주는데 따로 달라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 순간 나는 Subway에 가서 샌드위치를 살 때도, Starbucks에 가서 음료를 주문할 때도 내가 왜 그렇게 긴장이 되는지 전기가 통한 것처럼 이해가 되었다. '아, 나는 내가 먹을 것 하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결정하고 요구해 본 적이 많이 없구나.' 어릴 때는 물론이고, 어른이 된 이후에도 늘 있는 메뉴 중에 골라 감사히 먹었을 뿐, 음식 속에 무엇을 넣고 빼 달라는 요청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조차 없다.
그날 내가 지켜본 건 실습 나갔던 유아원의 만 3세 아이들이 교육받는 모습이었다. 선생님에 따라 또는 학교의 방침에 따라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하며 배우는 학습 내용에 따라 교육 현장은 그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그날 자연스럽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그들을 보며, 나는 왠지 알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은 초등학생, 고등학생, 어른이 되어 가면서 더 많은 결정을 스스로 하게 될 것이라는 걸, 결과가 좋든 나쁘든 내가 먹고 입을 것에서부터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어떻게 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것이 이들에겐 자연스럽다는 걸 말이다. 대신 선택해 주지 않는 사회, 이 사회에서 자란 아이들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으로 자라난다.
사실 스스로 결정한다는 게 늘 행복하기만 한 일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 결정한 일에는 늘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결과가 무겁게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일은 늘 내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면, 웬만하면 남의 일에는 신경 쓰지 않게 된다.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캐나다 사람들의 모습이 뼛속 한국인의 눈에는 가끔 참 정 없는 개인주의자들로 뵈기도 하는 것이다.
좋고 나쁨이 아니다. 그저 참 다른 것이다. 3살 때부터 샌드위치 속을 결정한 아이와 시리얼은 무조건 우유에 말아먹어야 한다고 받아들인 아이는 어른이 되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 결정하는 게 익숙한 아이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며 살아왔기에 다른 사람도 그럴 수 있게 놔두는 것이 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른이 된다. 주변을 의식 또는 배려하며 어른들이 정해준 것을 잘 따르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우며 자란 아이는 결정의 순간마다 장애가 오지만, 옆 사람의 짐 하나를 슬쩍 덜어주기도 하는 어른으로 자랄 수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참 재미난 세상이고 흥미진진한 캐나다다. 내가 이 나라에 살아가게 되지 않았다면, 이들의 삶을 이렇게나 속속들이 들여다볼 기회가 없었다면 이렇게 까지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며 고개를 흔들거나 쏘 쿨하다며 동경하게 되지는 않았을까? 나는 나의 모습이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이들의 모습이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 서로의 좋은 점을 배우며 스스로 발전하는 사회의 첫 발은 서로 다름을 아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