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4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밤새 깊이 잠들지 못했다. 시차 적응 못하고 뒤척거리는 외국 여행 첫날 밤처럼 한 시간에 한 번씩 눈을 떴다. 캐리어를 끌고 왔더니 뇌가 해외여행이라고 인식했나. 하긴 수술 앞두고 꿀잠 자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더 이상 잠자긴 그른 것 같아 간호사님이 주신 노란 고무줄로 머리를 땋았다. 머리카락이 긴 사람들은 수술 전에 머리를 묶어 정리해야 한다. 근데 머리 모양이 정해져 있다. 고등학교 때도 안 해본 양 갈래 머리. 암 덕분에 별 걸 다 해 보는군. 중얼거리며 화장실 거울 앞에 섰다. 머리카락을 반으로 가른 후, 한쪽을 잡고 다시 세 갈래로 나눠 정수리부터 아래로 꼬아 주었다. 머리가 길고 웨이브가 있으면 모양이 예쁘게 잡혔을 텐데. 이 와중에 모양이 맘에 안 들어 땋았다 풀었다를 반복한다. 전문가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된 부스스한 중단발이라 땋다 보면 자꾸 머리칼이 손에서 빠져나간다. 수술실에 누워 있더라도 단정하게 보이고 싶은데.(수술하면 머리에 비닐 캡을 쓰기 때문에 머리 모양 따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걸 퇴원 후 ‘의학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드르륵드르륵 바퀴 굴러가는 소리, 물건 나르는 소리, 의료진들의 대화 소리가 문 틈으로 새어 들어왔다. 수술 준비가 시작됐다는 신호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000 환자님, 수액 놓을게요."
오전 5시. 양 쪽 가슴 수술 환자라 팔에 바늘을 꽂을 수 없어 난생처음 발에다 수액을 맞았다. 혈관이 안 보이면 여러 번 찔려 고생한단 얘길 들어서 긴장했는데, 간호사님이 한 방에 잘 찔러주셨다.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지만 시간이 지나며 통증이 사라졌다. 링거를 발에다 다니 움직이는 게 불편했다. 미리 세수하고 머리 땋길 잘했지.
수술 전 검사를 받기 위해 환자들이 데스크 앞에 모였다. 나와 같은 병명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니, 애틋하고 짠한 마음이 올라왔다. 소리 내어 인사하진 못했지만, 수술 잘 받으시고 건강히 회복되시길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발에 꼽은 바늘 때문에 걷기 불편한 나를 위해 간호사님이 휠체어를 가져오셨다. 둘러보니 다른 환자들은 전부 팔에다 수액을 맞고 있었다. 다들 엘리베이터 앞까지 제 힘으로 성큼성큼 걷는데, 나만 간호사님의 손에 이끌려 휠체어로 이동했다. 제일 젊은 내가 제일 노인이 된 기분이다. 여기서 유일한 '양쪽 암' 환자. 그걸 눈으로 확인하자 마음이 살짝 욱신했다.
수술 부위를 그리기 위해 초음파실 침대에 누웠다. 의사 선생님이 가슴을 초음파로 꼼꼼히 확인하며 수술할 부위를 표시하셨다. 이쑤시개 같은 걸로 콕콕 찌르며 사인펜으로 슥슥. 아프진 않았다.
초음파 실을 나와 '감시 림프절 검사'를 위해 핵의학과로 갔다. 종양 부위에 푸른 염색약이 든 주사를 넣고 감마 카메라로 주사 부위를 약 10분간 촬영한다. 이게 말로만 듣던 '공포의 유륜 주사'구나. 가슴에 주사를 맞을 때 아프다는 의견이 많아서, 바늘이 들어가는 순간 온몸이 경직됐는데, 왜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통증이 없었다. 사람마다 다른 것 같다.
모든 검사를 마치고 병실에 올라오니 오전 7시 30분. 톡이 울렸다. <잠시 후 000 선생님 회진 예정입니다.> 주치의 선생님이 오셨다.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레지던트와 간호사 선생님들이 나를 주욱 에워쌌다.
"수술은 오후 1시 20분 정도에 시작할 거예요. 나이가 어려 순서가 밀렸어요."
마흔 살 훌쩍 넘었는데, 여기서는 자꾸 젊은이 취급을 받는다.
"그리고... 왼쪽 가슴 그린 거 보셨죠? 전 절제해야 할 것 같아요.."
어쩐지. 초음파실에서 엄청 넓은 반원을 그리시더만. 그게 다 암들이 사는 구역이었군요.
이제 내 왼쪽 가슴은 암과 함께 보내 줘야 한다. 슬펐지만 수술이 코 앞이다 보니 암덩어리나 깨끗이 떨어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컸다. 그나저나 오후 1시 30분 수술이면 밤 11시가 넘어야 식사가 가능하단 말인데, 이거야 말로 또 다른 비극이다.
티브이를 켰다. 눈은 화면에 있고 대사도 들리는데, 누가 물어보면 무슨 내용인지 설명할 수 없다. 그 상태로 침대에서 한참을 뒹굴거렸다.
"000 환자님, 나오세요."
오후 1시. 휠체어에 몸을 싣고 엘리베이터 문 앞에서 수술장을 가기 위해 기다렸다. 평소엔 비 오는 월요일 아침 출근길 버스처럼 더디게 오던 엘리베이터가 초고속 열차로 변신해 슈욱 올라온다. 문이 열린다. 간호사님이 4층 버튼을 누른다.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심장이 빠르게 뛴다. 이제 이 문이 열리면 수술장으로 들어가겠지. 호흡이 빨라진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수술실이 보인다. 입구 바깥에는 환자를 기다리는 보호자 몇 명이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 있다. 코로나 이후 방문객을 제한했기 때문에 병문안을 할 순 없지만, 수술하고 나올 때 잠깐 환자 얼굴 보는 건 가능하다. 오겠다는 엄마를 뜯어말렸고, 신랑에겐 올 필요 없다고 했다. 겨우 십 분 만나기 위해 여기와 기다릴 가족들을 생각하면, 몹시 불편하다.
수술장 입구에 가니 환자 한 명이 앉아있다. 곧 침대가 들어오더니 그분이 올라가 눕는다. 의료진들이 침대를 끌고 수술실로 사라진다. 나도 곧 저렇게 되겠지. 내 침대가 들어온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 누웠다. 드르륵드르륵, 뒤통수에 전해오는 바퀴 진동을 느끼며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밝고 환했다. 머리 위로 물방울무늬 무늬 조명들이 쏟아져 눈이 부셨다. 의료진이 양팔과 다리를 묶었다.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나를 3인칭 관찰자에 투영했다. '나는 지금 수술을 하러 온 게 아니야. 수술실을 구경하는 중이라고. 여긴 드라마에서 보던 병원 세트장이랑 비슷하네. <슬기로운 의사 생활> 같군.'
"이제 푹 주무시면 돼요."
산소마스크가 씌워지고 가스가 들어온다. 주치의 샘이 점점 흐릿해지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을 떴다. 사방이 조용하다. 이불 안으로 따뜻한 바람이 들어와 몸을 감싼다.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푹 자고 일어났을 때처럼 개운하다. 의료진이 침대를 잡더니, 8층 내 병실로 끌고 간다.
우욱.
병실 침대로 옮겨 눕는데, 칼 맞은 것처럼 등이 욱신거렸다. 가슴을 얼마나 동여맸는지 숨쉬기가 힘들었다. 어제 읽은 안내문을 떠올리며 마취 가스를 빼기 위해 심호흡과 기침을 반복했다. 두 손을 배에 올리고 배가 불룩하게 나올 정도로 5초 동안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들이 마신 숨을 3초 정도 참는다. 배의 근육을 수축하면서, 폐에 있는 공기를 전부 '뱉어내듯이' 숨을 내쉰다. 이렇게 5회 반복. 그다음엔 아랫배에 힘주고 기침을 3번 하기.
오후 5시 20분. 주치의 선생님이 오셨다. 수술은 잘 됐다고 하셨다. 불편한 곳은 없는지 물으신다.
"저기, 혹시... 전이가 있었나요?"
수술 전 검사에서는 전이가 보이지 않더라도, 수술장에서 열어 보면 림프절을 따라 암이 발견되는 경우(림프절 전이)가 있기 때문에, 선생님을 만나면 전이 여부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전이 없어요. 푹 쉬세요." 내 맘을 읽으셨는지, 재빨리 대답하셨다.
한숨이 놓였다. 병원에만 오면 안 좋은 얘기를 들어서 자주 마음이 무너졌는데 이렇게 좋은 소식도 듣는구나. 암 진단받은 이후 처음으로 평온함을 느꼈다. 큰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