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풀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후 병동 데스크에 갔다. 키 몸무게 같은 간단한 신체 측정 후, 여러 가지 설문 조사를 했다.
컴퓨터에 앉아 현재 건강과 관련된 수 십 가지 질문에 체크하는데, 생각보다 문항이 많았다. 은근히 시간이 오래 걸렸다. 처음엔 정독하면서 마우스를 '따알깍' 눌렀지만, 뒤로 갈수록 '딸깍딸깍 딸깍' 재빨리 클릭하고 끝냈다.
병실에 돌아와서 가슴둘레를 쟀다. 수술 후 입을 압박 브래지어 사이즈 때문이다. 잠시 후, 또 다른 간호사 선생님이 들어오시더니 수술 및 병동 생활에 관한 안내문을 하나하나 꼼꼼히 설명했다.
수술 전 검사에서는 림프절 전이가 안 보였지만, 수술장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수술을 해 봐야 정확한 결과를 안다. 유방에서 가장 가까운 림프절을 떼어내 검사하면 겨드랑이에 전이됐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데, 이걸 '감시 림프절 검사'라고 한다. 여기서 전이가 발견되면, 겨드랑이 림프절 전체를 제거(곽청술)할 확률이 높다. 미세하게 한 개 정도 전이된 경우는 '곽청술'을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친절한 간호사 선생님의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후, 지하 1층 편의점에 갔다. 생수와 음료수를 사서 마개를 미리 열어 놓았다. 나는 양팔을 모두 수술하기 때문에 도움받을 팔이 없다. 수술 직후 음료수 뚜껑 돌리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예감은 정확했다! 미리 안 따놨으면 간호사 선생님 호출할 뻔.)
저녁 6시에 식사가 나왔다. 16년 전 제왕절개 수술 이후 처음 먹는 병원 밥이다. 그때 병원 밥은 너무 슴슴해서 맛이 없었는데, 암센터 음식은 생각보다 간이 짭짤하니 입에 맞았다. 남이 해 준 밥이라 더 맛있나. 밥이랑 국을 싹싹 비웠다.
It's 디저트 타임. 식사를 마치고 신랑이 챙겨 준 조각 케이크를 꺼냈다. 인스타로 선착순 20명에게만 판매하는 맛집이라 멜론 차트보다 순위 안에 들기 힘든데, 신랑이 빛의 속도로 손가락을 놀려 20위 안에 진입했다. 먼 길 가는 나를 위해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으신 듯. 엄마에게 사진을 보냈더니 병원에 저걸 싸 가지고 갔냐며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내셨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재미나게' 살고 싶다. 설령 그게 '병원'에서 하는 '암 수술'일지라도. 침대에 앉아 넷플릭스를 보며 달달한 케이크를 먹고 있으니, 정말 호텔에 온 것 같았다. 고소하고 신선한 생크림과 향긋한 딸기가 입 안에 퍼지자 엔도르핀이 빠르게 돌았다. 그래, 이 기분 주욱 가는 거야!!
밤 10시. 이 시간에도 누가 들어올 까 싶었는데(의료진들이 이렇게 자주 들어오는지 몰랐다) 담당 의사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레지던트로 보이는(확실치 않음) 젊은 선생님이었다. 말 그대로 주치의 샘이 없는 밤, 주말 동안 나를 '담당'하는 의사였는데, 수술 전 동의서를 설명하고 사인을 받으러 오신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궁금한 건 없냐고 물어보신다. '선생님은 어떻게 공부해서 의대에 가신 거예요?'라고 진심으로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게임은 성실하게 하는데, 공부는 한량처럼 하고 있는 아들내미를 둔 어미의 본능이다.
잠이 안 온다. 다인실에 있으면 어쩔 수 없이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뒤척였겠지만, 1인실이라 맘 편히 등을 켜 놓고 병실을 왔다 갔다 했다. 적막이 싫어 켜 놓은 티브이에선 광고가 계속 흘러나왔다. 케이블 티브이는 광고를 너무 길게 한다. 게다가 암보험이랑 상조 상품은 왜 이렇게 자주 나오는지.
평소보다 샴푸를 두 배로 늘려 한동안 못 감을 머리를 마지막으로 감고 침대에 누웠다. 밤 12시다. 애써 잠을 청하진 않았다. 때 되면 눈이 감기겠지. 오늘 밤은 쉽게 잠들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