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편지
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은 건 며칠 전의 일이었어.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니 언니와 어머니가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어.
“이 시간에 어디 가는 거야?”
얼굴에 어두운 빛이 어린 어머니는 내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다가 말했어.
“어서 준비해. 시간 없으니까.”
“무슨 일인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언뜻언뜻 기억나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시던 할머니의 얼굴.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동안, 할머니의 인생을 헤아려 보았어. 나는 감히 알 수도 없는 여자의 생애를 조심스레.
할머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을 거야. 할머니는 머리가 좋아서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던 여자아이였을 거야. 소녀가 되어 집안일을 거들고, 좋아하는 남학생과 연애를 하다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가던, 평범한 사람.
하루하루 밥을 짓고, 아이들과 한 이불을 덮고 추운 겨울밤을 보내기도 했을 거야. 가끔은 행복하기도 언젠가는 우울하던 날도 있었을 거야.
앤.
아버지의 결혼식에서 할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가 할머니의 앞에서 당당한 얼굴로 절을 올릴 때 할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저녁. 별 대신 동그랗고 커다란 행성만이 밤하늘에 동동 떠 있었어.
“쟤가 대체 누구야?”
“걔잖아, 걔. 다섯째네 딸.”
“머리를 잘라서 못 알아봤네.”
빈소는 텅텅 비어 있었어. 친척 어른 몇 명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은 없었어. 할머니의 삶이 그토록 초라했던가. 할머니의 곁에 아무도 남지 않을 만큼, 그렇게 허망했던가.
나는 언니 손을 잡고 영정 앞에 섰어.
할머니, 저 왔어요.
영정 속 할머니는 환하게 웃고 계셨어. 늘 그랬듯이 나를 향해 웃어주시던 그 모습 그대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나는 얼른 흰 국화를 한 송이 집어 그 앞에 내려놓았어. 할머니의 영혼이 앞으로 더욱 찬란하기를 바라면서.
“너 졸업은 언제 할 거니?”
“조금 있으면요.”
“다른 애들은 잘만 졸업하고 좋은 데 취직하던데, 너는 아직이니?”
나에게 관심 없는 사람들. 머리를 잘랐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
“기대 많이 하고 있어. 네가 성공해서 우리 집안에 훌륭한 사람이 나오면 좋겠구나.”
큰아버지는 내 등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어.
거친 손. 부르튼 입술. 텁텁한 담배 냄새.
“감사합니다.”
나는 말했어. 그리고 나와 언니와 어머니는 늦은 밤 빈소를 나섰어.
버스를 타고 캄캄한 밤의 서울을 달려 집으로 향하는 길. 버스의 작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흰 빛이 반짝반짝 눈이 부시도록 빛났어. 광고 안에서 강아지가 왕왕 울고 여자와 남자는 깔깔 웃고 있었지.
“이 버스는 돌아가는 버스인가 보다.”
“응, 그런가 봐.”
앞자리에 땀 냄새가 나는 남자가 앉았고, 재잘거리는 여자들이 그 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아저씨들, 아주머니들, 그리고 사람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어.
달도 없이, 하늘은 온통 캄캄하기만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