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편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니?”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어. 대학 입학 시험 준비를 할 때 함께했던, 내가 무척 좋아했던 선생님.
“지금은 학교를 쉬고 있어요.”
“휴학?”
“네.”
나는 조그맣게 대답했어. 선생님은 후후 웃었어.
“괜찮으면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자. 언제가 괜찮니?”
“평일엔 아르바이트를 하니까, 주말이 좋아요.”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보자.”
“네.”
통화를 마치고 머릿속에 선생님의 모습을 그려 보았어. 해바라기처럼 환하게 웃으며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님. 밝고 또렷한 음성과 반짝반짝 빛이 나던 미소.
나는 흐뭇하게 웃으면서 수화기를 내려놓았어. 선생님의 얼굴을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것 같았거든.
“이쪽으로 와. 많이 기다렸니?”
“아뇨. 방금 왔어요.”
선생님은 몇 년 전에 비하면 훌쩍 말라 있었어. 예전엔 살집이 조금 있고 눈빛에 생기가 돌았는데, 어쩐지 선생님에게는 예전처럼 밝은 빛이 없었어. 피아노를 연주하던 선생님의 모습은 정말로 눈부셨는데. 이상하게도 선생님의 눈에는 컴컴하고 희미한 빛만이 일렁이고 있었지.
“맛있니.”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소박한 백반집에서 선생님이 물었어. 넓은 사기그릇에 담긴 나물밥. 허겁지겁 밥을 먹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선생님은 나를 바라보며 눈웃음을 짓고 있었어.
내 밥그릇은 거의 다 비워가는데, 선생님은 몇 숟갈 뜨지 않은 것 같았어. 아침을 늦게 먹어 배가 고프지 않은 걸까. 나물밥이 취향이 아닌 걸까. 속이 안 좋은 걸까.
나는 주머니를 뒤적거려 하얀 봉투를 꺼내 선생님에게 건넸어.
“레슨비 안 낸 것, 드리려고요.”
봉투에는 그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은 몇 푼의 지폐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어. 불룩한 봉투를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어.
“학교 잘 다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걸. 대학교에선 생활비가 많이 들 거야. 여기저기 돈 쓸 데도 많고. 그러니까 다시 가져가렴.”
선생님은 다시 나에게 봉투를 건네며 말했어.
선생님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언젠가의 아침, 레슨비를 낼 돈이 없어서 나는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어.
“돈이 없어서 이번 주 수업은 받지 못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선생님.”
내 말을 듣던 선생님은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어.
“커피 한 잔만 사 오렴. 괜찮으니까.”
커다란 그랜드 피아노 위에 올라간 뜨거운 커피 한 잔. 나는 선생님의 앞에서 연습했던 곡을 연주했고, 선생님은 웃지도 화를 내지도 그렇다고 나를 무시하지도 않고 커피를 홀짝 마시더니 나에게 말했어.
“그 부분 한 번만 다시 해볼까?”
“사실, 오늘 생일이에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내가 말하자 선생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어.
“정말? 그럼 선물이라도 사 줘야겠다. 요 근처에 백화점이 하나 있어. 같이 갈래?”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어. 선생님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었거든. 선생님의 커다란 손이 내 작은 손을 꼭 움켜쥐고 백화점으로 이끌었어. 우리는 길을 건너고 골목을 돌고 돌아 으리으리한 백화점으로 향했지.
샹들리에가 아름답게 반짝거리는 고급스러운 백화점 안에 선생님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들렸어.
“이 아이 피부에 어울리는 걸로 하나 주세요.”
선생님이 점원에게 말하자 점원은 내 얼굴을 유심히 보더니 분홍색 립스틱 하나를 건넸어. 선생님은 립스틱 뚜껑을 열고서 허리를 숙여 내 입술에 립스틱을 발라 주었어. 입술에 닿는 부드럽고 촉촉한 감촉. 나는 입을 꾹 닿은 채 어색한 얼굴로 선생님을 보고 있었어. 내 입술에 분홍빛을 덧입혀 주는 선생님을.
“음. 잘 어울린다. 이렇게 보니 정말 대학생 같네.”
선생님은 희미하게 웃었어. 그제야 나는 선생님을 따라 생긋 미소를 지어 보았어.
점원은 립스틱을 포장해서 작은 쇼핑백에 담아 주었고, 우리는 백화점을 나섰어.
“바래다주고 싶은데 시간이 없네. 또 레슨이 있어서.”
버스 정류장 앞에서 선생님이 말했어. 선생님은 검은색 세단 운전석에 앉아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서 있었어. 나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어.
“오늘 감사했습니다. 선물도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당연한 건데.”
선생님도 오늘, 나처럼 즐거웠을까.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 앞으로도 꾸준히 연락했으면 좋겠다. 기운 내고 건강하고. 힘든 일 있을 때 고민하지 말고 연락하렴.”
선생님은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차를 타고 휑하니 사라졌어. 나는 선생님의 자동차가 저 멀리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줄곧 그 자리에 서 있었어. 조그만 립스틱이 담긴 쇼핑백을 손에 들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