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터에 갈 때는 가끔 젤리, 사탕 따위를 일부러 챙긴다. 아이들에게 단 걸 주는 게 좋은 건 아니지만 말 안 듣는 아이 설득할 때 그만큼 요긴한 것도 없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다. 매번 먹을 걸로 보상하자니 아이들이 그걸 당연시 할까 봐 걱정이고 아이들이 용돈으로 군것질을 하다 보니 약발이 떨어지기도 한다. 그럴 땐 어떻게든 말로 설득해야 하는데 그게 또 만만치가 않다. 아이들에겐 무적의 말이 있다. “왜요?” 혹은 “아닌데요.”이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그렇게 되받아쳐 버리면 지쳐서 말할 기운이 똑 떨어진다.
요즘 아이들이 유독 버릇이 없어 보이는 건 부정하기 힘들다. 나뿐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도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 땐 안 이랬던 것 같은데 요즘 애들은 정말 다르긴 다르다고. 유튜브나 틱톡에서 유행하는 말이나 행동을 분별없이 따라하고, 저출생 시대 아이가 귀하다는 걸 아이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하지만 언제까지 ‘나 때는 안 이랬는데.’ 하며 지낼 수만도 없는 노릇. 환경이 바뀐 걸 어쩌겠는가. 백날 그 시절 얘기를 해봤자 아이들에겐 전혀 와 닿지 않을 것을.
봉사 초기만 해도 말로는 절대 아이들을 당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다. 내가 애들을 너무 수동적인 인격체로 보고 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아이들이 어른의 말을 안 듣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고분고분 어른이 하라는 대로 하는 어린이라니, 상상만 해도 좀 슬프지 않은가.
그래도 유독 말이 안 듣는 아이를 만나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4학년 핸드볼부 여자 아이가 딱 그랬다. 지금은 야간부라 차량을 타고 귀가하지만 전에는 내가 집까지 데려다줬는데 헤어질 때마다 매번 전쟁이었다. 센터에서 집까지 겨우 5분 거리인데 집 앞에서 안 들어가려고 해서 매번 20분 정도 실랑이를 벌였다. 그냥 무시하고 발길을 돌리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주택가 골목길에서 큰소리로 떠들어대고, 차가 지나갈 때 장난으로 그 앞에 막아서려고 하고, “선생님, 추울 땐 털 팬티를 입어 봐요. 그럼 따뜻한 대신 간지러울 거예요.”하고 뜬금없이 황당한 소리도 하고, 정말이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였다.
이 아이는 학습을 정말 싫어해서 다른 아이들이 문제집을 한 장 반씩 풀 때 서너 문제를 겨우 푸는 수준이었다. 하기 싫다고 책을 찢어버리고 글씨가 안 보일 정도로 연필로 세게 색칠해 버리고 책을 던져버리고 온갖 반항은 다 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 두세 명 지도하는 것보다 이 아이 한 명 봐주는 게 더 진이 빠졌다.
“너 이렇게 하면 이따 안 데려다 줄 거야.”, “학습 안 하면 젤리 안 줄 거야.” 이런 식으로 협박하는 것도 질릴 즈음 아이와 가만히 눈을 맞추다 내 진심을 그대로 전해보고 싶어졌다.
“저번에 분명 말 잘 듣겠다고 한 것 같은데, 이러면 앞으로 선생님이 네 말을 어떻게 믿어?”
“하기 싫은 걸 어떡해요.”
“그건 아는데 매일 네가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는 없어. 어른들이 공부를 하라고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고 센터에서도 학습하고 노는 게 규칙이야. 선생님이 많이 시키는 것도 아니고 남들보다 양도 줄여줬잖아.”
“…….”
“어제도 봐주고 그제도 봐줬으면 오늘은 좀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러면 너한테 믿음이 점점 사라져. 처음엔 튼튼한 벽이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무너진 것 같아.”
이렇게 말해봤자 장난으로 넘기거나 들은 척도 안 하겠다 싶은 넋두리였지만 아이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뭔가 충격을 받은 듯 잠시 가만히 있다가 얌전하게 문제를 푸는 게 아닌가. 내가 좀 지쳐 보여서 미안한 마음이 든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번 한 번 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 아이가 조심스럽게 내게 와서 이렇게 물었다.
“지금은 벽이 어떻게 됐어요?”
“응?”
처음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한동안 못 보다 만난 거라서 바로 벽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 벽 있잖아요.”
아이는 좀 쑥쓰러운 표정으로 내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는 뒤늦게 아이의 말을 알아듣고 이렇게 말해줬다.
“음, 지금은 한 이만큼 다시 쌓인 것 같은데?”
“그럼 오늘 공부하면 더 높아져요?”
“당연하지.”
벽 이야기를 할 때만 해도 이게 몇 달 내내 아이의 마음에 자리 잡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천방지축이던 아이가 갑자기 모범생이 되는 기적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공부하기 싫어서 투정을 부린다. 그래도 사탕이나 젤리보다 벽 이야기에 더 반응을 보이면 귀여워 죽겠다.
“지금은 벽이 어떻게 됐어요?”
“벽돌집처럼 튼튼해졌어.”
“지금은 벽이 어떻게 됐어요?”
“지진이 나서 다 무너져 버렸어!”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하고 묻는다. 그때마다 우리는 싱긋 웃으면서 “그런 게 있어.”하고 눈짓을 주고받는다. 나는 그저 센터를 오고가는 수많은 선생님들 중 한 명뿐인데 내 믿음이 한 아이에게 공부의 동기가 되었다니 이보다 더 큰 감동이 있을까. 물론 그에 맞는 책임감도 놓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게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건 역시 아이들 덕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