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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Oct 27. 2024

아이들은 언제나 정해진 틀보다 높게 뛴다

센터에서 아이들을 지도하는 게 내 일이지만 사실 내가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다. 아이들은 대체로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그게 왜 배울 점이냐. 나는 지나치게 규칙과 정해진 틀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물론 빨간불에는 길을 건너면 안 된다든지, 남의 물건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든지 하는 사회적인 약속은 엄격하게 지킬수록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에 자질구레한 규칙까지 다 의식하며 살아간다면? 그게 강박이 되고 그걸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자신이 미워지고 정신이 피폐해진다. 내가 그랬다.

센터에서 아이들과 놀아주는 방식은 대부분 보드게임이다. 센터에 보유 중인 보드게임이 많긴 하지만 자꾸 하다 보면 반응이 영 시들해진다. 그래서 150조각 직소퍼즐을 한 번 가져가봤다. 집중력과 인내력으로 맞춰야 하는데다가 그렇게 신나는 놀이가 아니라 아이들이 관심을 보일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런데 퍼즐을 꺼내어 혼자 맞추는 척 하고 있으니 슬금슬금 주변에 아이들이 모였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흐흐, 작전 성공!

솔직히 말하자면 난 퍼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조각의 자리가 어디인지 여러 번 맞춰봐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겪는 실패와 실망이 썩 달갑지 않다. 게다가 내 성격상 조각을 하나 집으면 완성 그림을 보고 어느 부분인지 영역을 좁힌 다음 그 안에서 맞는 자리를 찾는 편인데 그래서 금방 지치고 따분해진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느낌대로 시도해보는 건 왠지 규칙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하달까.

하지만 아이들은 달랐다. 애초에 그림 같은 건 신경 쓰지도 않았다.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내키는 대로 조각을 집어서 아님 말고 하는 식으로 요리조리 넣어보았다. 저렇게 해서 제대로 맞출 수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웬걸,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짧은 시간 안에 퍼즐을 완성했고 한 조각이라도 참여한 아이들은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가져와 완성작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런 건 약과다. 아이들의 대중없는 놀이 방식은 내 기대를 가뿐히 넘어선다. 예를 들어 사보타주라는 게임이 있다. 광부와 방해꾼 역할을 뽑은 다음 광부들은 굴 카드를 써서 금덩이가 있는 목적지를 찾아야 하고 방해꾼은 광부들을 다른 길로 유도하여 교란에 빠뜨려야 한다. 광부가 금덩이를 찾으면 광부들이 이기고 카드를 다 쓸 때까지 찾지 못하면 방해꾼이 이긴다.

이 게임의 묘미는 방해꾼이 거짓 정보를 흘리고 광부인 척 연기해서 광부들을 교란시키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속고 속이는 모습을 상상하며 야심차게 게임을 들고 갔지만 막상 게임을 해보니 상황이 전혀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방해꾼 카드를 뽑은 아이가 방해꾼 역할을 아예 안 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자기가 아는 금덩이 위치를 다른 광부들에게 알려주기까지 했다.

처음엔 당연히 그 아이가 광부인 줄 알았다. 그래서 광부들의 승리로 게임이 끝나고 정체가 밝혀졌을 때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너 방해꾼이잖아. 근데 왜 방해를 안 했어?”

아이는 뚱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냥요.”

크으. 너 멋지다! 게임 규칙을 이해 못한 것도 아니고 고의적으로 역할을 무시해 버리다니. 신중하게 게임을 골라서 가져간 나였기에 살짝 허탈하면서도 어딘가 개운했다. 게임을 만든 사람의 의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저 당당한 태도가 부럽기까지 했다. 나는 도대체 왜 놀이도 공부처럼 원리원칙을 지키려고 하는 걸까. 이런 걸 보면 난 참 재미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요새는 좀 많이 풀어졌다. 최근엔 아이들과 원카드를 자주 하는데 내가 먼저 새로운 규칙을 제안했다. 원카드 규칙이 워낙 단순하다보니 아이들이 금방 익숙해져서 게임이 너무 싱겁게 끝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안한 규칙은 숫자 카드를 낼 때 그 숫자로 시작하는 낱말을 말해야 한다는 것! 예를 들어 1은 일기장, 3은 삼계탕, 7은 칠판,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약 오 초 안에 말하지 못하면 카드를 한 장 먹어야 한다. 처음엔 애들이 심드렁했는데 막상 해보니 재밌어 한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얼마나 뿌듯하던지. 여기에 덧붙여 어떤 학생이 제안을 하나 했다.

“색깔 바꾸는 카드 있잖아요, 바꾸고 싶은 색깔 말할 때 그 색깔이 들어간 물건 이름 대기 어때요?”

“오, 좋은 생각이야!”

“민트색은 하늘색이랑 파랑색도 허용할까요?”

“(일부러 한껏 심각한 척) 쓰읍, 그래야 하지 않을까? 민트색 들어간 물건은 많이 없으니까.”

아이들이 이렇게 적극 동참하면 신나서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쌓일수록 지금까지 너무 답답하게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정해진 규칙대로만 살려고 했을까. 시들해진 게임에 색다른 규칙 하나만 더해도 다시 설레는 것처럼 아무리 익숙해진 일상이라도 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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