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치맛바람으로 초등학교 6년 내내 반장이나 부반장을 맡아서 했다.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이 성향과 맞지 않았지만 그땐 엄마나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인정받는 게 삶의 목표였다. 그래서 시키는 일은 고분고분 어떻게든 해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열 살쯤 되는 아이에게 무리한 책임이었다 싶은 반장의 임무도 있다. 바로 반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인지 5학년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 당시 담임선생님은 교무실에 일이 있으면 나에게 “반장이 애들 좀 자습 시키고 있어.”라고 말한 뒤 자리를 비우셨다. 떠드는 학생이 있으면 칠판에 이름을 적어놓으라고 하셨다. 나는 선생님 대신 교탁에 앉아 아이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는데 솔직히 처음엔 애들보다 윗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기쁨은 아주 잠시일 뿐 이어지는 시련은 나를 완전히 압도했다.
솔직히 같은 반 아이가 반장이랍시고 앞에 서 있는데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그것도 체격 아담하고 순한 얼굴에 목소리는 또 어찌나 앳된지 아무리 단호히 말해도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걸. 선생님이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이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댔고 나는 조용히 하라는 말만 부질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다 눈에 띄게 시끄러운 아이의 이름을 칠판에 적었는데 그 아이의 눈이 날카로워지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뭔데 조용히 하라는 거야?”
그때는 그 아이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여서 미웠다. 학생이면 마땅히 선생님 말씀을 잘 듣고 수업시간엔 공부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왜 당연한 것을 따지려고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그 아이를 문제아로 단정 지었다. 그런데 지금은 똑같은 학생들 중 한 명에게 감당할 수 없는 권력을 위임한 선생님이 원망스럽다. 애초에 35명 남짓한 아이들을 동갑인 한 아이가 휘어잡을 수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 비슷한 실수를 내가 했다. 학습실과 놀이방에 동시에 있을 수 없으니 나도 모르게 아이들 중 가장 연장자를 골라 “네가 여기서 가장 형이니까 동생들 좀 조용히 시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차라리 모든 아이들에게 얌전히 놀라고 주의를 주는 게 나았는데 나 좀 편하자고 한 명에게 책임을 떠맡겨 버렸다. 결국 연장자인 아이는 동생들을 지켜보느라 제대로 놀지도 못했다. 그리고 동생들이 자기 말을 듣지 않으면 진심으로 속상해하고 답답해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이 예전의 나와 겹쳐 보였다.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지 못하는 게 내 무능처럼 느껴지고 선생님이 실망하실 거라는 두려움에 좌절감을 느꼈던 그 때의 내가 말이다. 진심으로 후회되었다. 내가 아이한테 괜한 스트레스를 줬구나.
한국은 나이를 기준으로 위계질서를 세우는 데 익숙하다.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문화를 받아들인다. 문제는 모든 상황에서 나이를 앞세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버릇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엔 다른 선생님이 한 아이에게 동생들 좀 조용히 시키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그 아이는 자기 말을 잘 들은 동생에게만 문구점에서 산 군것질이나 장난감을 줬다. 다른 아이가 자기도 달라고 조르자 “내 말 잘 들으면 너도 받을 수 있어.”라고 말했다. 그 모습이 대견하다기보다 걱정이 앞섰다. 고민이 깊어졌다. 정말이지 아이들 앞에 서면 고민이 끊이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