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유일하게 고모네가 산다. 고모는 5남 1녀 중 막내다. 오빠들에게 둘러싸여 커서 그런지 무뚝뚝하되 털털하고 쿨하다. 그런 고모는 고차원적인 아재 개그를 선보이는 가정적인 고모부와 상병 한 달 차인 첫째 아들, 재수를 준비하는 둘째 아들을 거느리고 있다.
가정을 이룬 나를 비롯해 언니와 남동생, 상경한 사촌동생들은 세 달에 한번 꼴로 고모네 방배동 아파트로 모여 거나하게 마시고 배불리 먹는다. 그것도 점심에 저녁까지 두 끼나.
대게 12시에 가면 8시까지 있다 오는 꼴이다. 제아무리 점심만 먹고 와야지. 고모 힘드니까 한 끼만 먹고 와야지 마음 먹지만, 항상 저녁거리까지 준비한 고모를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린 고모가 차려주는 음식을 즐겁게 배불리 먹고 너나 할거 없이 같이 치우며 설거지를 자처한다.
처음엔 고모가 ‘이번 달에 애들이랑 시간 잡고 주말에 한번 와.’라고 연락 올 때면 마음 언저리가 불편했었다. 그건 그들에게 큰 빚을 졌기 때문인데, 다 갚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1년이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그때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상경해서 영상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보증금이 없었고 원룸의 월세가 부담돼서 고시원에 살며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두 달 정도 지내고 있을 때 고모부에게 연락이 왔다. 명절 때와 서울에 놀러 갔을 때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인 고모부였다. “고시원 괜찮나? 거기서 지내지 말앙. 우리 집에 왕 지내.”(“고시원 괜찮니? 거기서 지내지 말고. 우리 집에 와서 지내.”)
얼마 후 난 고모네 10살, 6살 아들의 방에서 지내게 됐고 두 아들은 안방으로 건너가 자게 됐다. 이 층 침대의 위층은 4달 동안 사람의 채취를 잃은 채 비워졌다. 고모는 생활비도 받지 않고 따끈한 밥과 아이들의 방까지 내어줬다. 나는 더이상 배고프지 않았고 잠자리는 포근했다. 근데 같이 지낼수록 얹혀사는 게 불편해졌다. 뭐라 말할까. 곤란함과 미안함에서 시작된 불편함이랄까. 고모네가 바쁜 걸 볼 때면 도움이 되지 않는 내가 짐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고모와 고모부가 내게 잘해 줄수록 그들의 눈치를 보게 됐다.
불편함의 시작은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 듯하다. 고모는 맞벌이다.(지금도) 아침 7시경 두 아들을 깨우고, 눈도 뜨지 않은 애들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혔다. 그 과정에서 고모의 언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많았다. 모든 과정을 힘겹게 마치고 아이들에게 신발을 신겨 집을 나섰다. 문이 '쾅' 닫히면 그 뒤에 서 있던 내겐 정체모를 감정이 채워졌다. 나 혼자 동 떨어진 섬에 있는 느낌이랄까. 고모가 정신없이 출근과 등원 준비를 할 때면 우두커니 서있거나 방에 앉아 있는 게 난처해졌다.
그래서 출근 준비하느라 바쁜 고모를 도와 사촌 동생에게 밥도 먹이고, 옷도 입혔다. 고모네가 나가면 아이들이 먹다 만 음식들을 정리해 설거지를 했다. 이 외에도 자질구레한 난처함을 몰아내려 노력하는데도 불편함은 하루하루 쌓여갔다.
그중에서도 고모부의 관심은 큰 비중으로 채워졌다. 내가 생각해도 고모의 조카와 같이 산다는 게 고모부의 입장에서는 어색하고 불편할 거 같다는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고모부에게 나는 방 한가운데 박힌 치울 수 없는 걸림돌이진 않을까. 고모로 인해 해야하는 어쩔 수 없는 의무감으로 나를 챙겨주는 건 아닐까. 의심했다. 그땐 고모부의 사람 좋음을 알아볼 됨됨이가 없었다.
끝내 방문을 닫고 지내는 날들이 늘어났다. 눈치 보기 싫었고, 불편하기 싫었다. 아늑한 공간이 내겐 벗어나고 싶은 공간이 되었다. 급기야 그들에게도 나의 감정은 흘러 가 닿았다. 고모네 첫째 아들의 10살 생일이었다. 밤 8시. 느지막하게 퇴근한 고모부는 흰 바탕에 파랑 무늬가 그려진 케이크 박스를 들고 귀가했다. 아이들은 신났다. 거실에 상이 차려졌다. 케이크가 주인공이 되고 그 옆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미역국이 자리했다. 난 방 안에서 거실의 상황을 흘깃 보고 있었다. 준비가 될수록 숨고 싶었다. 그 자리는 내가 낄 자리가 아닌 거 같아 문을 닫았다. 고모부가 “현주야 나와서 같이 먹자”며 문을 열었지만 “영상 과제가 많아서. 과제해야 해요.”라고 단박에 거절했다. 밖에서는 “누나 왜 안 와?”라며 사촌동생이 계속 물었다.
얼마 후 고모에게 영상 공부에 집중하고 싶어서 고시원으로 옮길 수도 있다는 말을 흘렸다. 나는 날짜와 시간도 말하지 않고 기습적으로 짐을 싸서 고시원으로 나왔다. 거기에 더해 몇 달 후 고모에게 머뭇머뭇 연락해서 한 달 고시원비를 꾸기까지 했다. 30만 원이 고모부 이름으로 입금됐다. 고모부의 이름을 보자 명치가 체한 듯 답답하고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꼭 갚겠다고. 꼭 갚겠노라 다짐했지만.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생활비를 쓰고 고시원비를 내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돈을 모으는 게 아까웠다. 점점 돈 갚는 일을 간과하기 시작했다.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나중에 여유될 때 갚지 뭐.
내가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촌 동생들이 줄줄이 고모네 집에 머물렀다. 짧게는 3달, 길게는 1년. 내가 첫 주자였고, 두 번째는 둘째 삼촌네 아들. 세 번째는 친언니, 네 번째는 셋째 삼촌네 아들, 다섯 번째는 셋째 삼촌네 딸. 이 시간은 어림잡아 3년은 되리라.
그 시간 동안 고모네 두 아들은 자기네 방도 없이 거실에서 숙제를 했고, 놀았고, 안방에서 잠들었다.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고 나니, 내게 내어주었던 방 한 칸은 조카라도 쉬이 내어주기엔 쉬운 결정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걸 너무 뒤늦게 알아차려서 온몸이 죄송함으로 닳아 올랐다. 그래서 늦게나마 고모네에게 더욱 잘하고 싶고, 베풀고 싶다. 고모가 부르면 가서 맛있게 밥을 먹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고모와 고모부의 생일에도 자그마한 선물을 챙긴다. 고모네 첫째 아들이 수능을 본다고, 대학에 입학한다고, 군대에 간다고 할 때. 둘째 아들이 수능을 보고 재수를 한다고 할 때 서슴없이 용돈을 건넨다.
지금도 그들에게 물어보면 상경해서 고생할 조카들에게 자그마한 보금자리를 내어주는 건 당연한 도리라고 목소리 한번 흔들리지 않고 말한다. 그건 연고지 없는 서울에서 고생하며 자리 잡은 고모네였기에 베풀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고모네 집에 가면 “바쁜데 여기까지 오셔서 영광이네요.”라고 우숫갯소리를 하는 고모부. 시간 잡고 왕래를 자주해야 서로가 편하고 친근해진다고 말하며 지금도 우리를 챙기는 이유. 그건 바로 ‘애정’이 아닐까.
가족 관계와 책임과 의무와 관습을 떠나 누군가 누군가에게 행하는 당연한 호의.
별 거 아니라 말하는 배려가 한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도움이 되곤 한다. 그게 커피 한잔이든, 밥 한 끼든, 선물이든. 기부든. 모두 상대방을 향한다. 고모와 고모부가 내게 지지대가 되어주고자 했던 것도. 조카들에게 따끈한 방과 편안한 이부자리를 제공한 것도. 바빠도 날 잡고 정성 가득한 요리를 내어주는 것도. 호의에서 우러나온 관심과 애정이었다.
나는 고모와 고모부에게 또 다른 사랑을 배운다.
앞으로도 고모네 가족에게 베풀며 살고 싶다. 더 나아가 내 주위 사람에게도.
누군가가 베푼 사랑으로 누군가는 또 다른 사랑을 배우며 성숙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