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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내 엉덩이가 좋다

난 엉덩이가 크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을 기억한다. 중학교 1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남녀 합반이던 중학교에선 입담이 좋은 애들은 금세 두각을 드러냈고 인기인이 됐다. 그 남자아이도 그중 하나였다. 어느 날, 그 애가 나를 보더니 ‘120’이라 불렀다. 이유는 이랬다.


“엉덩이 사이즈 120! 야! 120! 너 엉덩이 진짜 크다!!!”



그날부터 남자아이들은 나를 ‘120’이라 불렀다. 처음엔 웃어넘겼지만 매일 듣다 보니 내 엉덩이가 그렇게 큰가 싶었고, 창피했다. 어느 순간 걸상에 앉으면 의자에 남는 부분을 손가락 마디로 쟀다. 그리곤 눈대증으로 옆에 앉은 여자 친구와 비교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여자 친구들은 양쪽에 엄지 한 개씩 들어갈 정도로 남았다. 반면에 난 개미  한 마리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딱 맞았다. 그때 인정하게 됐다. 엉덩이가 크긴 크다는 걸. 이 버릇은 대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고등학교 때든, 대학교 때든. 몸매가 날씬한 아이들이 의자에 앉으면 남는 여분을 흘깃 봤다. 다들 남았다. 그때마다 의자에 여분 없이 딱 맞는 내 엉덩이 양 옆을 도려내고 싶었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쓰던 고등학교 때는 절정이었다. 그 시절 제주에는 상의는 오버사이즈 남방. 하의는 면 반바지. 신발은 닥터 마틴 스타일의 단화를 신는 게 유행이었다. 우리 반 아이들 반 이상이 그 스타일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나 역시도 그들 중 하나였다. 근데 이상했다. 난 왜 바지가 옆으로 넙데데하게 퍼져서 앞면이 유독 많이 보이는지. 오버사이즈 남방이라 품은 넓건만 왜 엉덩이에 남방은 닿는 것이며 왜 엉덩이 라인은 드러나는 건지. 왜왜왜 가리고 싶어도 가려지지 않는 건지. 친구들과 다른 내 몸이 너무나도 싫었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나의 콤플렉스는 남자들에겐 감추고 싶은 사실이었고, 여자들에겐 비교하며 자책하는 대상이 되었다.     



한창 연애로 풋풋한 20대 시절엔 사귀는 남자들이 내 엉덩이를 싫어하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다. 뭐든 이뻐 보이고 싶은 시기에 나의 콤플렉스는 걸림돌이었으니까. 역시나 최대한 엉덩이를 가렸다. 길가에서 엉덩이가 큰 아줌마들이 보이면 매의 눈으로 냉정하게 바라봤다. 둔해 보였고, 이쁜 바지를 입어도 보기 좋지 않았다. 내가 저러겠구나 싶어 침울했다. 엉덩이 큰 건 다이어트를 한다고 작아지지 않는다는 게 더 고개를 떨구게 했다. 급기야 ‘엉덩이 작아지는 수술’을 검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양악수술처럼 뼈대 자체를 깎는 엉덩이 수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 해도 거금이라 할 엄두도 못 냈겠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주위에서 “엉덩이가 커서 아이도 순풍순풍 겠다”는 말을 친구, 지인, 친척들에게 너나 할거 없이 많이 들었다. 그 말처럼 큰 어려움 없이 순산했다. 그때 잠깐 큰 골반이 고마웠다. 워킹맘으로 5년. 둘째 임신, 다시 처음부터 시작된 육아에 더하여 첫째까지 돌보다 보니 다른 걸 생각할 여력은 없었다. 일하고 육아하고 살림하기도 바빴다. 전업맘이 된 후론 잠자던 옷 그대로 입고 놀러 나가기도 했고, 5일 동안 머리를 감지 못한 채 지내기도 했고, 쌩얼로 나가는 일은 나의 일상이 되었으며, 거기에 더해 세수는 주중 행사가 되었다. 나 살기도 바쁜데 엉덩이 큰 게 무슨 대수라고. 그땐 콤플렉스보다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중요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아슬아슬한 둘째와의 1년이 지나고 나자 조금씩 외모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되도록 잠옷 그대로 놀러 나가지 않으려 하고, 이틀에 한 번은 머리를 감으려 하고, 선크림이라도 바르고 외출하려 하고, 세수는 매일 하려 애쓰게 된 것이다. 한껏 차려 입을 때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이리저리 보며 체크했다. 엉덩이가 부각된다 싶으면 나는 신랑에게 이렇게 말했다.     


“엉덩이 더 커 보인다 그치? 이 옷은 입지 말아야겠어."     


그때마다 신랑은 침 튀어가며 이런 말을 했다.

“엉덩이 큰 건 복이야! 남자들이 엉덩이 큰 거 얼마나 좋아하는데!”

“웃기지 마! 남자들은 호리호리한 몸매를 더 선호한다고!”

“그건 어릴 때나 그렇지! 난 당신 엉덩이가 커서 좋기만 하네요!”

그리곤 내 엉덩이를 한 대 찰싹 때렸다.      



난 어렴풋이 미소 짓고 있었다. 성적 불쾌감을 일으키는 발언이라고 지적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내겐 위안이 된다. 중학교 시절 그 아이로 시작된 놀림은 큰 엉덩이 콤플렉스를 불러왔고, 모든 남자들은 엉덩이 큰 걸 싫어한다고 생각하며 어림잡아 20년을 살았다. 근데 그건 흉이 아니라 매력이라고 말하는 신랑의 말은 나의 상처를 토닥여준다.  

신랑의 말이 정말 맞는지, 입 발린 소릴 하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다. 컴컴한 새벽 아이들을 재우고 유튜브 어플을 꾸욱 눌렀다. 네모난 검색창에 ‘엉덩이 큰 여자’를 입력했다. 수십 개의 영상이 검색됐다. 다들 큰 엉덩이는 매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번쩍, 하고 눈 하나가 더 떠지는 듯했다.     



신랑의 이야기는 틀리지 않았다. 난 오랜 시간 콤플렉스로 전전긍긍하던 세월이 구원받는 거 같았다.

난 아직도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7년간의 육아로 타인의 시선쯤은 무시하는 고랩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놀림받기 싫어 엉덩이를 가리려 애썼던 많은 날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간다. 남들의 시선이 괴로웠지만 나를 더 힘들게 한 건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나의 욕망. 손가락질 받고 싶지 않은 욕구. 그게 충족되지 않아 화나고 속상했던 날들.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쓰지 말자고 되뇌었지만, 아픈 곳이 찔릴 때마다 그러긴 쉽지 않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한다고 하지 않던가.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을 받고서야 콤플렉스는 사르르 사라졌다. 내 엉덩이가 나쁜 건 아니구나. 보기 싫은 건 아니구나. 더군다나 여성미를 돋보이게 해 준다니. 감사하기까지 했다. 그걸 깨닫는데 너무 오래 걸렸다는 건 손해지만.

    

콤플렉스였던 엉덩이를 이제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기로 했다.

‘킴 카다시안’처럼 멋진 엉덩이는 아니지만 난 이제 내 엉덩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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