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의 취향(2)

한병철 읽기(11), 10월 8일 단상

by 김요섭


환희의 송가


2호 라인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그는 감자볶음을 한입 넣으려다 말고, 빈 젓가락을 쥔 채 화면을 주시했다. 시야에 9층 사모님의 얼굴이 들어온다. '아 저 망할 여편네, 좀 사라졌으면...' 스포르찬도로 흔들던 마에스트로의 손은 멈춰버렸다. 그는 여자가 등을 보이고 있는 화면을 뚫어지게 본다.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다. 손날을 세워 그녀의 몸을 슬쩍 그어본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순간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화면이 흔들린다. 그는 깜짝 놀랐지만, 흔들리는 건 9층 여자가 있는 화면뿐이다.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멈췄다가, 미끄러지며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다. 전등이 미친 듯이 껌뻑거린다. 그녀는 극도로 당황해서 몸을 가누지 못한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뼈를 긁어댄다

발 딛고 있는 공간 자체가 요동치는 터에 순식간에 패닉에 빠지고 만다. 여자는 공포에 짓눌린 얼굴로 비상호출 버튼을 눌러댄다.


그는 입을 벌린 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아,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인가. 드디어 그녀는 순수해졌다. 고통만큼 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또 있을까? 그녀는 이제야 사장 부인이라는 껍질을 버렸다. 재앙의 순간에 비로소 자신을 찾은 것이다.


경비실에 빨간불이 요란하게 울린다. 그는 아주 느긋해졌다. 젓가락을 쥔 손이 다시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눈이 스르르 감긴다. 이제 막 시작된 연주가 끝나지 않기를... 리타르단도, 천천히 손을 가져간다. 조금만 더, 디미누엔도, 가장 느리고 약하게 자신만의 템포로. 죽음을 위해 죽음을 지연시킨다. 영원 같은 순간은 단절되고, 흐른다. 그는 잠시 멈췄다가 강렬한 손짓을 이어간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그의 표정은 환희로 가득 차 있다.


' 친구여, 이 소리가 아니지 않은가

더 활기 찬 노래를 불러야지

환희에 가득 찬 노래를...'


그녀의 고통스러운 신음과 절규는 합창으로 이어진다. 이제 마에스트로의 지휘에 온전히 복종한다. 그는 쥘 수 없는 것을 쥐고, 놓을 수 없는 것을 놓는다. 더 이상 원한과 증오는 들어오지 못한다. 환희의 장소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가 된다. 끝낼 수 없는 아름다움을 향해... 다시 한번 더,


'환희여 신성의 수호자여

천국의 딸이여

환희에 취해

천사처럼 하늘로 가자'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다. 고통스러운 환희로 범벅이 된 몸은 활어처럼 벌떡거린다. 허우적대는 여자를 주시하는 눈은 탐욕스럽게 온몸을 훑는다. 새하얀 원피스 아래쪽이 붉게 물들어 있다. 산산조각 난 엘리베이터 거울은 그녀의 왼쪽 갈비뼈 아래에 꽂혀있다. 허위의 거울을 깨버린 대가는 결코 작지 않다. 너무도 같은 사람이었던 그녀는 이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다만 파편이 남긴 자상이 생각보다 깊을 뿐이다. 피는 멈추지 않고 흐른다. 그녀는 점점 창백해진다.


9층 여자의 얼굴은 점점 영희의 얼굴을 닮아간다. 그는 홀린 듯 쳐다본다.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불시에 도착했다. 그녀와 두 눈이 마주친다. 영희는 예전처럼 슬며시 미소를 보인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위해, 붉은 드레스를 들춘다. 자상 사이, 접힌 곳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팔을 뻗는다. 피를 뚝뚝 흘리며 사랑은 장소 없이 현현한다. 그의 손은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안창살 부위까지 뻗었다. 한 번, 기관 없는 신체는 활짝 열린다.


'우리는 오랫동안 얼어붙은 바다 위를 걸어가던 방랑자의 상황에 놓여있다. 이제 기온이 변하고 수면은 갈라져 거대한 유빙들로 해체되기 시작한다. 고통은 얼음의 갈라진 틈 사이로 어둡게 어른거리는 요소다.' - 융어

매거진의 이전글그 남자의 취향(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