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곳을 감싸는 아름다움

「최후의 인간」 모리스 블랑쇼 읽기(49)

by 김요섭



1.

'유아적 풍경'은 '모든 사유를 추월'한 '희망'이자 '슬픔'의 흔적이다. 다시 한번 도약을 기다리며, 그곳을 바라볼 뿐인. 모든 것이 비어버린 '현실의 순간'은 '가라앉은 기억'으로 홀로 내버려진다. '지금이 아닌 다른 때의 그녀'를 추억하며, 또다시 망각하는 낯선 기다림. '여자의 얼굴'은 계속해서 텅 빈 곳을 감싸고 있다. 오직 부재하는 이미지로만 가능한 '그녀와 연결'된 형상.


2.

'사물들을 가볍게' 만드는 봄은 당신을 추방한다. '무게 없는 시선'은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성급히 하나가 되고자 한다. 도저히 우리가 될 수 없는 외로움은 메워지지 않을 상처. '홀로 있는 시선'은 더 깊이 벌어질 뿐이다. '추억들 중에서도 가장 멀어진 추억'. 그러나 떨어져 있기에, 무언가 다름이 시작된다. 낯선 것을 생성시키는 온전히 고독을 견딘 시간. 과거와 현재의 기이한 기울기는 또 다름의 시차를 계속해서 만들어 간다. 극단적으로 멀어져 있으나, 너무도 충만한 그곳으로의 '도취'. '매우 진지하고 기품 있는 태평함'은 오직 그녀를 통해 가능할 뿐이다.




현실의 순간은 모든 것을 가라앉히고 모든 희망과 슬픔 그리고 모든 사유를 추월한다. 내 방에서 함께 보냈던 모든 순간을 떠올릴 때면 내가 언제나 기억하게 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녀는 발코니에 누워 몇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약간 유아적인 풍경을 그리거나 전부 여자들의 얼굴만 그렸다. 어딘지 모르게 닮은 그 형상들은 그녀와 연결되었다. 어쩌면 그녀의 언니이거나 지금은 아닌 다른 때의 그녀.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이게 바로 당신에게 보이는 저예요." 다른 어떤 걱정도 없이, 더 이상 어떤 강요도 없이, 자신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나를 쳐다보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그녀는 나의 시선에 무게가 거의 없어서 그녀 주위의 사물들을 가볍게 만든다고 말했다. "이건 마치 당신이 혼자 있을 때와 같은 거죠?" ㅡ "아뇨." ㅡ "그럼 제가 혼자 있었을 때와 같은 건가요?" ㅡ "더 이상 그렇지 않아요. 아마도 홀로 있는 당신의 시선과도 같은 거겠죠." 유리창 반대편에서 모포에 둘러싸여 멈추지 않는 그녀의 손이 선을 그리는 동안, 그녀는 이따금씩 고개를 들었다. 내게 보인 그녀의 성향이 유아적이라고 할 순 없으나 미래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너무나도 멀어져 있고, 너무나 존재감 있으면서도 존재감이 희박했고, 그러면서도 매우 진지하고 기품 있는 태평함을 지녀서 나는 그녀에게 도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 감정은 틀림없이 그녀에게 부여되고 있는 인상이었다. 즉, 그녀를 취하게 했던 가벼움의 감정 말이다. 그렇다. 오래전부터, 그녀가 전혀 알지 못했던, 그녀가 그 감정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을 가벼움의 정신에 내맡겨졌을 때처럼. "그런데 당신은 조용하시네요." ㅡ "네. 저는 조용해요. 그뿐만 아니라 이미, 거의 추억과도 같아졌어요. 추억들 중에서도 가장 멀어진 추억들이요." ㅡ "그건 벌써 지나갔나요?" ㅡ "네 아마도 지나갔을 거예요."

(87~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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