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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백구 Jun 23. 2020

살인자의 서사가 진실에 미치는 영향

영화 <세 번째 살인> 리뷰(결말, 해석)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컷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범죄자가 말했다. 그는 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텔레그램)를 통해 미성년자 성착취물 등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로 붙잡혔다. 검찰에 송치되던 날, 그는 위와 같은 말을 던졌다. 언론은 무비판적으로 그의 말을 그대로 보도했다. 그는 순식간에 흉악하고 저질스러운 성범죄자에서 악마가 되었다. 이후 범죄사실 자체보다 그의 학창 시절, 졸업사진, 사회활동 등 범죄가 아닌 개인사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가 대중의 관심을 빼앗았다.


범죄자에게 서사가 생긴 것이다. 미국 드라마 <크리미널 마인드> 시즌4에는 범죄를 멈추도록 도와달라는 연쇄살인마가 등장한다. 그의 불우한 유년 시절,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아이들에게 느끼는 연민 등 층층이 쌓아가는 범죄자 시점의 이야기는 그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범죄 피해자들을 그저 희생양처럼 느끼게 한다. 최근 영화 <조커>는 범행 동기를 합리화하고 심지어 범죄 모방을 유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최근 공개된 청소년 성매매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인간 수업> 역시 유사한 이유로 논란이 일었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은 왜 비판받는가. 영화 <세 번째 살인>은 범죄자에 서사를 부여할 때 변하는 우리의 감정을 들쑤시는 작품이다. 범죄자에게 공감할 만한 서사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우리의 감정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범죄자와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말들로 인해 이야기가 전복될 때마다 관객들은 알 수 없는 감정 변화에 휩싸인다. 그러면서 묻는다. 범죄자의 서사가 그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


스포일러 주의

시게모리(후쿠야마 마사하루)는 재판에서 승리만 생각하는 냉정한 변호사다. 그는 살인죄로 30년을 복역하고 출소한 뒤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 미스미(야쿠쇼 코지)의 변호를 맡게 된다.

범행을 시인한 미스미의 예상 형량은 사형이다. 시게모리는 죄는 인정하되 갖가지 논리를 만들어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낮추려 한다.

그러다 피해자의 딸인 사키에(히로세 스즈)가 미스미와 친하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급기야 미스미가 기존 진술을 번복하고 무죄를 주장하면서 시게모리는 혼란에 빠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사진=영화 <세번째 살인> 스틸컷

영화 <세 번째 살인>은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영화다. 제41회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 등 6관왕에 올랐다. 그 외 해외 유수 영화제에 초청되었으며, 제74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 영화가 대체로 우리나라에서 인기가 없는 편이지만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은 남달리 국내 팬들의 반응이 좋다. 이에 힘 입어 연출한 작품이 모두 국내 개봉한 보기 드문 일본 감독이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어느 가족>, <태풍이 지나가고>, <바닷마을 다이어리>,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가족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살인>은 의미가 있다. 그의 기존 영화와 다르다. 가족 이야기를 통해 사회 문제를 드러내던 방식에서 벗어난다. 반대로 사회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인물들의 가족 관계를 노출시키고 이러한 관계들이 사회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여준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컷


우리는 법조계라는
한 배를 탔어.


영화를 보기 전 알아야할 것이 있다. 일본에서는 기소가 된 형사사건의 유죄 비율이 99%라는 점이다. 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영화 밑바탕에 깔고 있다. 시게모리가 기소가 된 피고인의 변호를 맡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는 죄 여부를 다툴 생각이 없다. 이미 기소가 됐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형량 낮추는 일에만 몰두한다. 형량을 낮추기 위해서라면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후반부에 미스미가 무죄를 주장하며 진술을 번복하지만, 재판 일정 지연이 귀찮은 판사는 검사와 변호인에게 "우리는 모두 법조계라는 한 배를 탔다"며 유무죄를 다툴 공판을 열지 않는다. 이처럼 영화는 일본 법조계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지적한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드러나는 인물들의 관계는 혼란을 야기한다. 우선 시게모리는 미스미가 피해자의 딸 사키에와 평소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 사건이 시작부터 문제가 있었음을 직감한다. 미스미는 30년간 수감생활로 인해 자신의 딸 메구미를 잘 돌보지 못해 고통스럽게 성장했다며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시게모리는 미스미가 아버지로부터 오랜 기간 성적 학대를 당하는 등 고통스러운 성장 과정을 겪은 사키에를 알게 된 뒤 그녀를 돕고자 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러면서 그 행동이 자신의 딸을 돌보지 못한 죄책감에서 기인했다고 느낀다.


시게모리는 미스미의 마음에 동조한다. 자신 역시 딸 유카(마키타 아쥬)를 충분히 보살펴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딸이 물건을 훔치다 가게 주인에게 들켰을 때가 열네 살인데, 이는 사키에가 아버지로부터 끔찍한 경험을 당하기 시작한 나이와 같다. 시게모리 같은 아버지가 없었다면 유카는 메구미처럼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시게모리는 자신의 딸과 메구미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미스미와 동일한 시선으로 사키에를 바라본다. 시게모리, 미스미, 사키에가 하얀 눈 밭에서 눈싸움을 하며 웃는 장면이 이를 대변한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컷


사실 죽이지 않았어요.
저를 믿으세요?


영화는 사건을 파헤치는 법정 스릴러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초반부를 보면, 시게모리는 사건을 파헤치면서 진실을 좇고 있다고 믿는다. 중반부가 지나면 예상치 못한 증언과 증인이 등장하고 미스미는 진술을 번복한다. 이때부터는 진실의 문제가 아닌 믿음의 문제로 전환된다. 종반부에 다다르면 진실은 더욱 흐릿해지고 믿음의 문제만 남는다. 마치 불교 <열반경>에 나오는 '맹인모상(盲人模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처럼 각자 믿고 있는 것 혹은 믿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드러낼 뿐이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컷

때문에 시게모리와 미스미의 대화는 점점 엇나간다. 시게모리는 진실을 알고 싶고, 미스미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미스미는 그저 시게모리가 자신을 믿는지 알고 싶다. 이는 촬영 방식을 통해 표현된다. 시게모리와 미스미가 만나는 장소는 언제나 구치소의 면회실이다. 면회실 장면은 창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두 사람이 앉아 서로를 마주 보는 형태로 구성된 장면과 카메라로 한 사람을 비추면 반대쪽 인물의 어깨나 등을 보여주는 장면이 주를 이룬다.


이 구도는 두 사람의 태도 혹은 감정이 변화할 때마다 달라진다. 조금씩 변하는 카메라 구도는 두 사람의 감정이 정점에 도달하는 마지막 만남에서 큰 변화를 보인다. 마주 보고 있는 두 사람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장면이다. 창 너머의 미스미와 유리창에 비친 시게모리는 마치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듯 보인다. 두 사람의 감정이 극단적으로 거리가 생긴 상태에서 마치 한 사람의 얼굴인양 겹쳐졌다가 점점 멀어지는 이 강력한 쇼트는 닿을 듯했던 진실의 모호함과 믿음의 허망함이 그대로 담긴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컷


그놈은 죽어 마땅해요.


두 사람의 다른 태도는 몇 차례 반복되는 이 대사로도 표현된다. 죽어 마땅한 사람. 즉,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시게모리의 아버지는 미스미가 첫 번째 살인죄로 기소됐을 때 재판을 했던 담당 판사다. 그는 30년 징역형을 선고했는데, 사형을 내리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며 살인자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때 죽었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스미는 두 번째 살인 피해자를 언급하며 "죽어 마땅해요"라며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하는 인간이 있다"라고 말한다. 나중에는 스스로에게도 그런 말을 한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컷

이는 일종의 선을 긋는 행위이다. 죽어 마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다. 인간 사이에 태생적 선과 악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반면 죽어 마땅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신입 변호사와 미스미의 사연을 들을 시게모리다. 시게모리는 범죄자에 대해 냉소적인 변호사지만 미스미와 사키에의 사연, 자신과 딸의 관계 등을 통해 범죄자와 감정적으로 동조하면서 '죽어 마땅하다'는 말에 반대한다. 악을 모르는 순수한 자와 악에게 공감하는 자만이 선을 긋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번째 살인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미스미가 실제로 행한 두 번의 살인을 제외하고, 앞서 이야기한 기소된 형사사건의 유죄 비율이 99%라는 점과 정의감 없는 법조인들의 판단으로 행해지는 사형 집행, 미스미가 '원한에 의한 살인'이 아닌 '절도 후 살인'이라 자백하여 형량의 수위를 높이고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말한 점에서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가 있다. 전자는 사법 살인이고, 후자는 사회악 처단이다. 영화는 실제 미스미의 살인 동기를 알려주지 않으면서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영화 <세 번째 살인> 스틸컷


여기선 아무도
진실을 말하지 않죠.


재판 결과 나오지 않는다. 재판이 끝난 뒤 공판 증인으로 출석했던 사키에는 "누구를 심판하느냐는 누가 정하는 거냐"라고 물으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본인 스스로도 시게모리의 설득에 원래 주장하려던 것과 다른 증언을 한다. 이는 재판 결과도, 진실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재판 후 미스미는 시게모리에게 무죄를 주장한 자신의 진술을 언급하며 "제 진술 번복에 동의한 겁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결국 살해한 이유가 아니라 그 이유에 따라 우리의 생각에 어떻게 달라지는지, 무엇을 믿거나 믿고 싶은지 묻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오랜 기간 성적 학대를 당한 아이를 돕고자 그 아버지를 살해한 남자와 돈을 뺏기 위해 딸을 가진 아버지를 살해한 남자는 다른가. 살인이라는 행위가 아닌 그 행위에 도달하게 된 이유가 범죄를 보는 시선을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은가. 범죄자의 서사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우리의 시선 변화는 곧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하는 것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미스미는 정말 사키에를 위해 살인을 택하고 거짓 자백으로 사형을 받아들인 것일까. 시게모리가 재차 묻자 미스미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 차려요.
저 같은 살인자한테
그런 걸 기대하면 못써요.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14719


영화 <세 번째 살인>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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