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백구 May 13. 2018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

<루비 스팍스 Ruby Sparks>


신발 한 짝 못 봤어?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나 물었다. 잘 모르는 여자 같은데 말을 건다.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평생을 이런 여자를 만나겠다고 생각해왔다. 꿈이 현실이 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머릿속에 항상 그려왔던 완벽한, 이상적인 그런 이성을 만났다. 눈을 비벼보고 소리도 질러보고 볼을 꼬집어도 봤지만 현실이다. 그녀가 찾는 신발 한 짝이 나였으면.
영화 ‘루비 스팍스’는 신발 한 짝이 어디 갔는지 물으며 시작한다. 마치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고르듯 사랑마저도 완벽한 조각을 구하는 주인공의 생각처럼 말이다. 언뜻 보면 완벽한 짝을 찾는 로맨티시스트의 생각처럼 보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알게 된다. 연인에게 내 신발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일인지.

조나단 데이턴-발레리 페리스 부부 감독이 11년 차 연인인 폴 다노-조 카잔 배우와 함께 이 같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를 만들었다. ‘루비 스팍스’는 누구나 적어도 한 번은 꿈꿔본 사랑이 실현되는 꿈에 대한 이야기다.
천재 작가 캘빈 웨어필드(폴 다노)는 로맨틱한 소설을 쓰고 있다. 어느 날 소설 속의 그녀, 루비(조 카잔)가 눈 앞에 나타났다. 상상했던 완벽한 여자가 내 집에 살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한다. 캘빈은 혼란스럽지만 소설을 찢고 나온 그녀와 현실 연애를 시작한다. 하지만 캘빈은 자신이 글을 쓰는 대로 루비가 움직이고 변한다는 점을 알고는 루비를 꼭두각시처럼 조정하기 시작한다.
스키니, 천재작가


캘빈은 그렇게 불린다. 열아홉 살 때 출간한 소설이 베스트셀러에 올라 이른바 ‘천재 작가’로 불리며 유명세를 누린다. 외형은 키는 멀대같이 크지만 연약해 보이는 몸과 무언가 어설픈 분위기를 풍긴다. 반면 루비는 등장하자마자 사랑스러운 매력을 뿜어낸다. 캘빈은 사랑스러운 루비를 자신만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꼭두각시처럼 조정한다. 글을 쓰면 루비는 변한다. 루비가 화를 내면 ‘항상 기분이 좋은 루비’라고 쓰고 내내 웃게 만든다. 밝은 모습이 과해지자 ‘평범한 루비’로 다시 바꾼다. 캘빈은 전 여자친구와 5년을 만나면서 일어났던 갈등 때문에 이미 지쳐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 대해 황홀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루비는 캘빈의 행동에 분노하고 떠나려 한다. 이 같은 전개는 로맨틱 코미디의 기본 공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설정이다. 유약한 남자와 사랑스러운 여자가 비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만나 현실 연애를 하는 이야기.


이러한 설정의 영화로는 ‘어바웃 타임’이 대표적이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팀(도널 글리슨)은 유전적(?)으로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연하게 메리(레이첼 맥아담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팀은 자신의 휴대폰에서 그녀의 전화번호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하지만 시간 여행으로 사랑을 이룬 두 사람은 현실적인 고민에 빠지며 우여곡절을 겪는다. 이처럼 두 영화는 판타지로 관객들을 설레게 한 뒤 공감 가는 현실 연애로 감동을 주는 패턴을 보인다.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과
이상적인 사랑,  현실적인 사랑 간의
차이를 말하고 싶었다.


각본을 쓰고 여자주인공 ‘루비’ 역을 맡은 배우 조 카잔의 말이다. ‘루비 스팍스’는 로맨틱 코미디 공식을 따라가지만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는 선명하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 꿈꾸던 이성과 사랑을 하면 흠결 없는 사랑을 할까.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해주는 이성을 만나면 행복해질까. 사랑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이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슬픔보다 두려움이 커진다.


루비는 캘빈이 창조했지만 감정이 있는 인간이다. 조종 당하는 루비지만 캘빈은 수많은 자극에 반응하는 다양한 감정 변화를 전부 설정할 수 없었다. 결국 루비는 캘빈에게서 벗어나려 한다. 캘빈이 자신을 인형처럼 다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캘빈은 상황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자 루비의 손가락 하나까지도 조작하려는 지경이 이른다. 캘빈의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이 내 마음과 다르게 행동할 때 느낄 수 있는 우리의 감정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서로 어느 정도는 거리가 있어야지.
안 그러면 둘이 너무 똑같잖아.


모든 것을 함께 하고자 하는 캐빈에게 루비는 “거리가 필요해”라고 소리쳤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거리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정신과 전문의 김혜남 박사는 저서 ‘당신과 나 사이’를 통해 "회사 동료는 1.2m, 친구는 46cm, 가족과 연인은 20cm의 거리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사람을 대할 때 불을 대하듯 하라.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라고 말하며 관계의 거리를 강조했다.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거리 조절에 실패한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우리는 감정의 장막을 활짝 열어놓고 있기 때문에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 영화 ‘루비 스팍스’는 관계의 실패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기억하자. 캘빈은 루비의 기억을 지웠다. 다시 만났지만 아는 척하지 않고 상대방의 거리에 맞춰 움직였다. 관객들은 우리가 그동안 몰랐던 사랑하는 방법을 이제야 알았지만 두 사람의 실패한 사랑에 ‘역시 깨진 유리컵은 다시 붙이기 힘들어’라며 마음대로 결론을 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캘빈을 기억하지 못하는 루비의 마지막 대사는 둘의 사랑이 끝났다고 믿고 있던 관객들을 무너뜨린다. 루비는 소설책을 들고 흉을 보다가 캘빈이 그 소설을 쓴 사람이라고 밝히자 당황한다. 그러면서도 루비는 이내 활짝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 다시 시작할까요?
(Can we start over?)




이전 11화 아름다움은 행복을 담보하지 않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