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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을 나는 백구 Aug 20. 2023

맹세

뜨거움을 잃지 않게 하소서!

만년(萬年)을 싸늘한 바위를 안고도 

뜨거운 가슴을 어찌하리야    

  

어둠에 창백한 꽃송이마다 

깨물어 피터진 입을 맞추어      


마지막 한방울 피마저 불어 넣고 

해돋는 아침에 죽어가리야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모든 것 다 잃고라도 

흰뼈가 되는 먼 훗날까지 

그 뼈가 부활하여 다시 죽을 날까지      


거룩한 일월(日月)의 눈부신 모습 

임의 손길 앞에 나는 울어라.      


마음 가난하거니 임을 위해서 

내 무슨 자랑과 선물을 지니랴    

  

의로운 사람들이 피흘린 곳에 

솟아 오른 대나무로 만든 피리뿐   

  

흐느끼는 이 피리의 아픈 가락 이 

구천(九天)에 사모침을 임은 듣는가. 
 

미워하는 것 미워하는 모든 것 다 잊고라도 

붉은 마음이 숯이 되는 날까지 

그 숯이 되살아 다시 재 될 때까지   

   

못 잊힐 모습을 어이 하리야 

거룩한 이름 부르며 나는 울어라. 


                                                                                 - 조지훈맹세


  16세 소녀들과 이 시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은 매 구절마다 나름 인상을 써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너무 감동적이란다. 그리고 이건 꼭 외우고 다녀야겠단다. 

만년(萬年)을 싸늘한 바위를 안고도
뜨거운 가슴을 어찌하리야

  어떻게 만년을 그 자세 그대로 있을 수 있으며, 게다가 차가운 바윌 안고 있는데도 가슴은 뜨거울 수 있냔다. 너무 낭만적이란다. 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면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이미 그런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특히

어둠에 창백한 꽃송이마다 
깨물어 피터진 입을 맞추어   

이 대목에서는 아이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찬탄이 들린다. 이건 뭐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지 아이들이 날 깨닫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뭔 말인지는 알고 그래?" 그랬더니 아이는 말한다. 

곁에 있는 약한 존재에게 자기 피를 나눠준다네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것도 자기가 깨물어 피터진 입으로요. 

  하, 이건 더 가르칠 필요가 없는 시로구나. '거룩한 일월 같은 임의 눈부신 모습'에 감동해서 '우는' 모습은 자기들도 충분히 이해한단다. 난 이해할 수 없는데도. 그래서 결심해 본다. 사랑의 시는 그냥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느낌을 말하라 하기로. 다음 시간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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