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움을 잃지 않게 하소서!
만년(萬年)을 싸늘한 바위를 안고도
뜨거운 가슴을 어찌하리야
어둠에 창백한 꽃송이마다
깨물어 피터진 입을 맞추어
마지막 한방울 피마저 불어 넣고
해돋는 아침에 죽어가리야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모든 것 다 잃고라도
흰뼈가 되는 먼 훗날까지
그 뼈가 부활하여 다시 죽을 날까지
거룩한 일월(日月)의 눈부신 모습
임의 손길 앞에 나는 울어라.
마음 가난하거니 임을 위해서
내 무슨 자랑과 선물을 지니랴
의로운 사람들이 피흘린 곳에
솟아 오른 대나무로 만든 피리뿐
흐느끼는 이 피리의 아픈 가락 이
구천(九天)에 사모침을 임은 듣는가.
미워하는 것 미워하는 모든 것 다 잊고라도
붉은 마음이 숯이 되는 날까지
그 숯이 되살아 다시 재 될 때까지
못 잊힐 모습을 어이 하리야
거룩한 이름 부르며 나는 울어라.
- 조지훈, 「맹세」-
16세 소녀들과 이 시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은 매 구절마다 나름 인상을 써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너무 감동적이란다. 그리고 이건 꼭 외우고 다녀야겠단다.
만년(萬年)을 싸늘한 바위를 안고도
뜨거운 가슴을 어찌하리야
어떻게 만년을 그 자세 그대로 있을 수 있으며, 게다가 차가운 바윌 안고 있는데도 가슴은 뜨거울 수 있냔다. 너무 낭만적이란다. 난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가정하면서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이미 그런 말 따위는 들리지 않는다. 특히
어둠에 창백한 꽃송이마다
깨물어 피터진 입을 맞추어
이 대목에서는 아이들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찬탄이 들린다. 이건 뭐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지 아이들이 날 깨닫게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한 아이에게 물어보았다. "뭔 말인지는 알고 그래?" 그랬더니 아이는 말한다.
곁에 있는 약한 존재에게 자기 피를 나눠준다네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것도 자기가 깨물어 피터진 입으로요.
하, 이건 더 가르칠 필요가 없는 시로구나. '거룩한 일월 같은 임의 눈부신 모습'에 감동해서 '우는' 모습은 자기들도 충분히 이해한단다. 난 이해할 수 없는데도. 그래서 결심해 본다. 사랑의 시는 그냥 읽어주고 아이들에게 느낌을 말하라 하기로. 다음 시간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