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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창래 Sep 23. 2019

랄향색탕마

-스핀오프 22

콜드브루를 사러 갔다. 게이샤는 없었다. 한 병을 샀다. 직원이 말했다. 

“같은 원두로 드롭커피를 한 잔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리셔요.”

덤으로 주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파는 게이샤 콜드브루는 1리터가 조금 넘는다. 그래서 비싸기도 하다. 보통 200밀리 단위로 판다. 만몇천 원짜리 상품으로 만드는 것이다. 마실 만했다. 일어서려는데 게이샤와 마주쳤다. 내 손에 들린 콜드브루를 보더니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돈을 내신 거죠. 또.”

나는 웃기만 했다. 

“잠깐만요, 선생님. 저녁 안 드셨죠? 저도 먹어야 해요.”

집에 돌아가서 홍소우육탕면을 먹을 작정이었다. 이건 국물을 만드는 데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린다. 시작부터 치면 두 시간이나 세 시간이고. 돌아가면 곧바로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혼자. 어물쩍하는 사이에 게이샤는 진도를 뺐다.

“뭐 드시고 싶으세요?”

“글쎄요. 게이샤는 뭐가 좋아요?”

“중국식 완탕은 어떠세요?”

어린 시절 부산 외갓집에 갔다가 처음 먹어 보았다. 맛있었다는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괜찮아요.”

가까운 곳이었다. 메뉴판을 보니 우육탕면도 있었다. 내가 만든 것과 어떻게 다를까 궁금했다. 완탕과 우육탕면, 그리고 청경채 볶음을 주문했다. 

“우육탕면도 만들 줄 아셔요?”

“예. 어려운 건 없습니다. 시간이 많이 걸릴 뿐이지요. 적어도 두 시간쯤은 걸립니다. 육개장 만드는 것과 비슷해요. 사용하는 향신채는 비슷한데 아주 다른 향신료를 씁니다. 꼭 넣는 것 가운데 하나가 팔각이라는 건데, 그 향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게이샤는 향이 강한 음식도 잘 드세요?”

“고수나 산초 같은 건 좋아하는 편이에요.”

“그러면 우육탕면도 좋을 거예요.”

우육탕이 먼저 나왔다. 접시를 하나 달라고 해서 덜어 주었다. 

“향이 좀 약하네요. 그래도 맛을 보세요.”

“이 향이 팔각향인가요?”

“여기에는 팔각 말고도 화자오, 큐민, 회향이 들어갑니다. 다른 향신료는 섞여서 튀지 않는데 팔각향만은 그렇지 않아요. 얼얼한 맛은 화자오 때문이고요. 화자오는 산초와 비슷한 향신료예요. 중국음식은 랄향색탕마 다섯 가지 맛이 어울린 게 많습니다. 여기에서 마가 얼얼한 맛을 가리킵니다.”

“랄향색탕은 뭔가요?”

“랄은 매운 맛, 향은 향기, 색은 색깔, 탕은 뜨거운 맛을 뜻합니다.”

게이샤는 웃음을 머금고 나를 쳐다보다가 우육탕면을 음미하더니 말했다. 

“우육탕면에 랄향색탕마가 들어 있군요.” 

한입 더 먹고 나서 다시 말했다.

“랄향색탕마...... 이 말에는 야한 울림이 있어요. 조금.”

“맛과 향에 대한 말은 언제나 좀 그렇죠.”

그때 완탕이 나왔다. 청경채와 함께. 게이샤는 완탕을 덜어 주었다. 

“선생님도 완탕 맛 좀 보셔요.”

“제가 집에서 만든 우육탕면은 이보다 맑고 강하고 깊어요. 맑은 건 좋은 고기만으로 국물을 내어서 그런 거고, 향신료를 조금 더 넣고, 더 오래 고아내거든요.”

“그러면 더 강한 랄향색탕마로군요.”

우육탕을 먼저 먹은 게 문제였을 것이다. 완탕 국물 맛이 밍밍했다. 맹물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 순간 게이샤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그늘이 보였다.  

“무슨... 걱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걱정까지는 아닌데요, 아무래도 변화가 필요한 것 같아서요. 요즘 카페가 대형화 추세인 건 아시죠?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스타벅스가 들어온다고 하네요.”

“아, 그러면 영향이 있겠군요.”

“그래서 서점을 겸할까 싶은데, 선생님 생각은 어떠세요?”

“저는 늘 해 보라고 권하죠. 전제가 있지만요.”

“전제가 뭔데요?”

“주인이 책에 대해 잘 알아야 해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야 해요. 따지고 보면 이건 간단한 논리입니다. 장사를 하는데 자기가 다루는 상품에 대해 잘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그 상품을 좋아하면 더 깊이 잘 알게 될 거고요. 그런데 책은 한 권 한 권이 다 조금씩 다른 물건이라 잘 알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긴 해요. 대신 오랫동안 알아가면서 그 지식이 축적되면 다른 사람이 넘볼 수 없는 진입장벽이 생깁니다. 누구든 짧은 세월 동안에 잘 알게 되는 건 아니거든요. 책이라는 상품의 특징이죠. 그래서 제대로만 한다면 날이 갈수록 잘될 가능성이 높은 거죠.”

“선생님의 경우를 보면 정말 그렇겠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그런데 왜 오래된 서점들은 다 어렵다고 할까요?”

“그런 곳도 있지만 잘 유지하는 곳도 있고, 새로 시작해서 이익을 내는 곳도 있어요. 왜 안 되는지도 알아 두어야겠지만, 왜 잘 되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겠어요?”

게이샤는 젓가락을 놓으며 말했다.

“이번 주 일요일 저녁에 시간이 어떠세요?”

“일요일 저녁이면 괜찮습니다.”

“그러면 일요일 저녁때 뵈어요. 지금은 들어가 봐야 해서요.”

식사를 마치고 게이샤는 서둘러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난날 사람들이 스쳐지나갔다. 그들은 모두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도움을 청했다.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너무 가까워지면 오래지 않아 헤어져야 했고. 그래서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닌가. 이대로가 좋다. 언제쯤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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