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 들숨, 입으로 날숨

by 바다하나

아이들이 떠나고 난 집은 고요하지만 내 가슴은 아직도 요란하다.


고등학교 2학년 딸은 아침 5시에 일어나서 샤워를 시작한다. 한 시간 남짓한 샤워를 마치고 나면 화장대 앞에 앉는다. 내 화장대보다 크고 화려한 화장대. 니가 연예인이냐고 소리치고 싶은 걸 꾹 참고 살다 보니 가슴엔 돌덩어리가 묵직하다. 그래도 다행인지 얼굴에 그림을 그리기 전에 베이스를 꼼꼼히 바른다. 간단히 수분 로션이나 바르면 될 것을 아이크림, 탄력 에센스는 왜 바르는 건지... 한소리 했다간 엄마처럼 되기 싫어서라는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 그것도 꾹 참는다. 30분 베이스를 바르고 나면 그다음 30분은 미술 시간이다. 눈썹을 그리고 색을 칠하는 미술 시간. 볼터치는 정교하다. 입술은 틴트부터 립밤까지 그 순서는 나도 아직 못 외웠다. 나는야 니베아 세대니깐.


이 추운 날 교복 치마를 끌어올려 맨다리를 실컷 드러내고 아직도 물기가 안 마른 머리를 찰랑거리며 집을 나서는 딸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치고 싶지만 난 대학 나온 여자다. 아침부터 상스러운 소리를 낼 순 없지. 새벽같이 일어나 정성을 들이는 저 노력에 박수를 쳐주자.

큰 딸이 나가고 나면 전날 과음하신 부장님 냄새가 나는 중3 아들 차례다. 금세 지나가는 중2병이라더니 얘한테는 불치병인가 보다. 7시 반에는 집에서 나서야 하는대도 7시 20분까지 한밤중이다. 한심하게 내려다보다 귀에다가 심한 말을 속삭여주면 살짝 움찔거린다. 들고 있던 핸드폰을 머리 위로 던지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내 속 어딘가에 돌덩이가 또 쌓여감을 느낀다.


아침부터 얼굴이 수십 번은 붉그락 푸르락. 체온이 올랐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아이들이 떠나고 나서 세수를 하려고 거울을 보니 두 뺨이 열꽃이 핀 듯 시뻘겋다. 가슴에 열불이 나는 걸 참아낸 내 두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저것들을 내 배로 내가 낳았다니…


아이들은 떠났지만 내 가슴은 아직도 요란하다.


아, 아직 한 놈이 남았다. 진짜 부장님 냄새가 나는 우리 김 부장. 8시 출근이므로 이제 일어날 때가 되었다. 출근하는 남편이랑 마주치는 일이 없게 딸아이 방에 가서 문을 닫고 조용히 눕는다. 부스럭부스럭 옷을 입고 부엌에서 물을 마시는 달그락 소리가 오늘따라 이유 없이 싫다. 왠지 일부러 아이들이 다 나가기 전까지 꾸물거리다가 일어난 것 같단 말이지... 띠리리 현관문을 닫고 집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방 문을 열고 기어 나온다.

이제 온전한 내 시간의 시작이다.

커피를 내리고 유튜브에서 ‘갱년기 힐링 음악’을 검색한다. 커피 향을 맡으니 조금 숨통이 트인다. 아이들 방은 쳐다보지 않는 게 내 정신 건강을 위해 좋다는 건 알지만 냄새를 견딜 수 없어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켜준다. 사춘기 아이들을 위해 엄마로서 해주는 최소한의 배려이다. 거실로 나와 쌓여있는 빨래를 대충 한쪽으로 던져 넣고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한쪽 발로 쓱쓱 밀어 구석으로 치워놓는다.

모두가 떠난 집은 커피 향으로 가득 차고 내 마음은 고요하다.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한다.


“후욱~ 후욱~”


코로 들숨, 입으로 날숨.


난 배운 여자야. 난 교오양 있는 여자야.


오늘도 소리 한번 지르지 않고, 아이들을 내보낸 것에 대한 셀프 칭찬을 한다. 소리 지른 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내 얼굴에 주름살만 늘어갈 뿐.

아이들을 깨우느라 진을 빼고 등교 준비를 시키느라 악을 지르는 아침 풍경 같은 건 우리 집에 없다. 아이들 등교에 남편 출근을 시키자마자 세탁기를 돌리고 아이들 방 청소를 한다고? 하아. 그런 주부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흥, 하수들.”


설마 아이들이 한창 잘 먹어야 하는 나이라며 마트에서 장을 봐다가 간식을 장만하는 주부는 없겠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고 믿는다. 애들은 어차피 학교 앞 분식집에서 다 불어 터진 어묵꼬치와 설탕과 엠에스지가 듬뿍 들어간 떡볶이를 먹을 것이다. 남편은 회사에서 더 비싸고 맛있는 걸 먹고 들어올 테고.

난 오로지 내가 먹을 과일과 고기반찬만 준비하면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땐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자식새끼들 먹이느라 내 입에는 과일즙이나 몇 방울 들어갔던가. 사과며 배며 깎아서 대령하면 늘 몇 조각 남겨 놓아 버리기 일쑤. 고기반찬은 굽기가 무섭게 사라지고. 언제나 내가 먹을 건 내가 정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이 남긴 걸 먹을 뿐.


풉, 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아등바등 자식들을 키우던 내 모습이 가소롭다. 이렇게 나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왜 몰랐을까.


아이들은 아이들의 인생. 나는 나의 인생을 사는 것뿐이라고 선을 긋는 순간,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찬바람에 코가 시려와 아이들 방 창문을 닫아버린다. 이불의 먼지가 소복하겠지만 절대로 털지 않는다. 그 먼지 내 코에 들어가는 거 아니다. 아침 내내 딸과 아들 때문에 울그락 푸르락 올라왔던 열불이 가라앉고 기분이 상쾌해졌다. 정신이 맑아지고 개운한 느낌이 들어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한껏 기지개를 켰다.

맛있는 드립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 장바구니를 들고 마트로 향한다. 오늘은 한우를 두 팩사서 구워 먹어야지. 혹시 엄마가 먹고 남으면 몇 점 구워줄게. 얘들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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