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나와 화해하고 사과하기
새 학기의 첫날을 위한 준비는 교과서를 투명한 비닐로 반듯하게 싸 모서리를 맞추고 투명 테이프로 꾹꾹 눌러 붙이는 일로 시작되었다. 나는 그것이 새로 받은 교과서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어떤 해는 하트 무늬가 총총 박힌 투명한 선물 포장지였고, 어떤 해에는 두꺼운 비닐 같은 포장지였다.
깨끗하고 좋은 필기구의 색깔을 맞춰 준비했고 지우개쯤은 하나 새로 샀던 것도 같다.
새 공책에는 몇 학년 몇 반 이름, 과목명을 궁서체로 꾹꾹 눌러썼다.
이번엔 진짜 잘해 봐야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새 학년 새 교실에 첫 발자국을 들인 순간 어색함과 불편함에 나는 얼어붙어 버렸다. 그렇게 다짐하고 꼼꼼히 준비했지만, 새로운 환경 새로운 사람들 속에 있는 나는 초라해 보이기만 했다.
학창 시절의 많은 시간을 난 홀로 외로웠다.
조용하고 말이 없는 성격, 세상 근심 다 짊어지고 있듯 진지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교실 한 자리를 차지하고만 있던 있는 듯 없는 듯했던 아이가 나였다.
낯선 사람들 앞에 서기만 하면 나는 긴장했고, 불편했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딱히 할 말이 없기도 했거니와 먼저 말을 꺼내기 전 속으로 수십 번 연습하고, 이 말에 상대가 어떻게 반응할까를 고민하는 것이 싫어 대부분 나는 입을 다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편한 아이였다.
콤플렉스도 많았다.
왜 부모님은 나에게 친구들처럼 찰랑찰랑 내려앉는 머리카락 대신 이런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를 물려주었을까?
나는 왜 이렇게 굵은 허벅지와 종아리를 가지고 태어난 걸까?
나는 왜 예쁘지가 않을까?
나는 왜 이렇게 키가 작을까?
난 왜 인기가 없을까? 난 왜 춤이고 노래고 미술이고 딱히 잘하는 게 없을까?
왜 아무도 날 좋아해 주지 않는 걸까?
누가 이런 나를 좋아해 줄까? 누가 나랑 친구가 되고 싶어 할까? 나도 이런 내가 부끄럽고 창피한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좋은(?) 성격을 가질 수가 있는 걸까?
나는 극도로 내향적인 사람,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다.
감정을 파악하는 데는 능숙하지만 표현하는 데는 서툴기 때문에 관계에 있어서 걱정을 하는 경우가 많고 실제적이고 꼼꼼하게 계획적이며 협조적으로 일을 처리하지만 완벽한 결과물을 도출하지 못할 경우 스트레스를 상당히 받는 ISFJ 타입의 사람이다. (MBTI: ISFJ)
내향성, 외향성, 성격의 다양성에 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어린 나는 이런 나의 성격이 부족함으로, 부끄러운 단점으로만 느껴졌다.
그런 나를 바꾸기 위해 나는 의도적으로 낯설고 불편한 상황에 나를 던져 넣어 보기도 했고 용기를 내어 과대나 조장 등의 리더 역할을 떠맡아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주 조금씩 겉으로 보이는 나의 모습을 바꾸어 나갔기에 성인이 되어 나를 만난 사람들은 나의 이런 어두운 면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하다.
뭔가에 집중해서 고민하고 일에 빠져 열심히 하는 것도 나에겐 즐거운 일이다.
내 본래의 성격은 내 안에 깊숙이 숨겨져 있을 뿐 사라지지 않았다.
좋고 나쁜 성격이란 것은 없다는 것, 단지 다른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인정하게 되기까지 참 많은 시간이 걸렸고 여전히 마음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다.
상담을 통해 내 안에 "화"가 많다는 진단을 받았다.
"화"가 일어날 때, 대부분 그것은 상대의 행동이나 말 때문이 아니라 그의 행동이나 말이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화"를 건들었기 때문에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는 어느 순간이든, 어떤 상황이든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던 거고 그것을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 보통은 남편이 건드는 순간 나는 폭발한다.
내 안에 숨겨져 있는 "화"의 근원을 찾아야 사람들과의 관계의 회복이 가능하다고 한다.
화의 근원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치열하게 고민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되돌아보았고, 남아 있는 기억의 조각조각들을 맞춰 보았고 그때의 감정을 떠올려 보며 깨달았다.
난 어린 시절 내가 부끄러웠고, 못마땅했고, 창피했고 싫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자기혐오로 똘똘 뭉쳐 있어 "나"자신을 끊임없이, 꾸준히 비난하며 살아왔다.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나"는 얼마나 화가 나고 속상하고 외롭고 슬펐을까?
내 안에 쌓인 화를 풀어내기 위해 어린 시절의 나에게 사과를 했다.
내가 널 너무 괴롭혀서, 비난해서, 미워해서 미안해. 있는 그대로의 널 인정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나를 용서해줘.
가슴에 오래오래 쌓여있던 묵은 화를 몸 밖으로 하나씩 하나씩 흘려보낸다고 상상하며 나에게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
내 안에 얼마나 많은 화가 쌓여 있을지, 그것들을 흘려보내는데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다.
내가 관심을 갖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회피해서 나도 모르게 쌓여갔을 화와 상처가 얼마나 다양하게 많이 남아 있을지 상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타고난 성격인 내향성이 자기혐오의 모습으로 나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려면,
쌓여있던 화가 엉뚱한 방향으로 제멋대로 튀어나가 관계를 망쳐버리는 것을 막으려면,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한다.
어린 시절의 나와 화해하고 진심으로 사과하기!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