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실업급여’라는 것을 신청하고 왔다. 이번이 내 인생 첫 퇴사는 아니지만, 수급 조건에 해당해 급여를 신청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신청 절차가 어떻게 되는지, 고용복지센터를 방문하기 전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온라인으로 꼼꼼히 절차도 알아보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센터 직원과 미리 통화도 해놓았다.
신청 당일, 어렵게 주차를 하고 센터 건물로 올라가는 길. 발걸음이 묘하게 무거웠다. 이곳은 내가 근로자였던 시절, 업무 관련으로 여러 번 출장을 왔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때는 회사 업무를 위해 자신 있게 발걸음을 옮겼던 장소였는데, 이번에는 구직자의 입장으로 같은 문을 들어선다니 기분이 묘했다. 같은 공간이지만 이상하게 낯설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더 조심스럽고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드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나와 같은 목적으로 센터를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일까. 복도 바닥에는 큼직하게 그려진 실업급여 신청 안내 화살표가 줄줄이 이어져 있었다.
번호표를 뽑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불이 켜진 창구로 향했다. 창구 직원은 매일 반복하는 업무인 듯 익숙하게, 약간은 기계적으로 서류를 내밀며 재빠르게 설명을 이어갔다. 미리 정보를 찾아보고 와서 다행이지,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왔으면 이 복잡한 과정을 한 번에 이해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궁금한 점도 있어 이것저것 물어보긴 했지만,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그녀가 왠지 모르게 부럽게 느껴졌다. 대단한 직업도 아니고, 어쩌면 그녀도 과거의 나처럼 계약직일런지 모르지만, 단지 현재 직업이 있다는 사실이 그날따라 유독 부러웠다. 동시에 나 자신이 작아지는 느낌도 함께 들었다.
왜 나는 그토록 작아져야 했을까? 사회적 위치와 직함, 더 이상 받을 연봉이 없다는 사실이 나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잠시 쉬어가는 것도 다 내가 선택한 길인데, 왜 그렇게 움츠러들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고 싶어서 선택한 길이 아니던가. 지금의 멈춤이 언젠가 더 큰 도약으로 이어질 거라 굳게 믿었는데, 왜 나는 이 순간 마음이 휘청이는 거지?
센터를 나서는 나의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룸미러에 비친 내 모습을 흘끗 바라보았다.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얼굴. 그 순간만큼은 거울을 오래 들여다볼 수 없었다. 그건 부끄러움이나 수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마도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동안 나를 지탱해 주었던 ‘직장인’이라는 정체성, 그것을 잃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내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이것도 네가 선택한 여정의 한 부분이야.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작게 보진 말자. 근로자였던 시절, 넌 정말 행복했니? 그동안의 삶이 진정 네가 원하던 것이었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트에 잠시 들렀다. 직장인 시절의 나는 늘 시간에 쫓겨 대충 장을 보고 서둘러 나오곤 했지만, 이날은 가족을 생각하며 천천히 식재료를 고를 수 있었다. 이 시간이 새삼 감사하게 느껴졌다. 신선한 채소를 고르다 문득 웃음마저 났다. 이런다고 누가 나에게 월급을 주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수고를 했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혼자 뿌듯해하는 거지?
집에 와 냉장고를 열어 재료를 정리하고, 도마 위에서 채소를 썰고, 냄비가 끓는 소리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내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가족을 위해 정성껏 만든 음식 냄새가 온 집안을 채우자 내 마음마저 따뜻해지는 듯했다. 그날의 저녁 식탁은 평소보다 더 풍성했다. 작은 반찬 하나에도 정성을 담았고, 아이가 좋아하는 메뉴까지 추가한 식탁은 마치 작은 축제와도 같았다. 딸은 엄마가 차려준 집밥이 너무 맛있다며 “엄마카세가 최고”라 농담을 던졌고, 남편은 평소보다 더 자주 “맛있다”를 말해주었다. 가족들도 이날의 내 마음을 알아챈 걸까. 남편과 아이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나의 커리어가 멈춘 듯 보이겠지만, 이 시간은 단지 또 다른 방향을 찾기 위한 잠시의 멈춤일 뿐이라는 것을.
현대 사회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강요한다. 쉼 없이 달려야 하고, 잠시라도 멈추면 도태될 것처럼 불안감을 조성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멈춤 속에서만 보이는 것들도 있다. 미처 보지 못했던 일상의 작은 반짝임, 가족과 공유하는 함께의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잊고 있었던 진짜 '나'의 모습.
고용복지센터에서 느꼈던 스스로에 대한 움츠러듦은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한 걸음 물러나야 더 멀리 그리고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는 법이니까. 그날의 나는 실업급여 신청자였지만, 동시에 가족을 위해 따뜻한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이자 아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나를 찾아가는 여정의 주인공이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직장이 나를 정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쉬어간다고 해도 내 가치는 변함없다는 것을. 오히려 이 시간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소중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날 밤 아이와 남편이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고 조용해진 거실에서 혼자 차를 마셨다. 따뜻한 차 한 잔이 몸을 데우며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주었다. 그제서야 나는 나 자신에게 속삭일 수 있었다. “잘하고 있어. 넌 충분히 괜찮은 선택을 한 거야. 너만의 속도로 이 길을 걸어가는 것도 충분히 아름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