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함께 하는 작가 자의식 생성기
"하지만 한참 저 아래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나의 뿌리와 그 사람의 뿌리가 이어져 있다는 감촉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깊고 어두운 곳이라서 잠깐 내려가 상황을 살펴본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라는 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그것이 이어졌다고 감지합니다."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 간직합니다. 내가 상정하는 것은 아마도 그런 독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72p)
독자는 내게 '터치'의 대상이다. 그러나 때로는 독자는 만족시켜야 할 대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9. 독자란 누군인가?
독자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관심"에 대해서도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독자를 누구라고 생각하냐에 따라 이 예민한 "관심" 부분도 달라진다고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내가 즐기기 위해서 쓴다'는 기본적인 자세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글을 쓰면서 즐거우면 그것을 똑같이 즐겁게 읽어주는 독자가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지 않은가. 그 사람들과 멋지게, 깊숙이 서로 마음이 통했다면 그것으로 일단은 충분하다, 라고."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61p)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그것을 똑같이 즐겁게 읽어주는 독자가 틀림없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로 괜찮지 않은가."
"그 사람들과 멋지게, 깊숙이 서로 마음이 통했다면 그것으로 일단은 충분하다."이다.
이렇게 생각하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렇다면 내 소설이 끝나는 그 순간 나는 할 일을 다한 것이다. 이 소설이 받아들여질지, 터치가 될지는 독자에게 달렸다. 만회할 기회는 다음 소설에서 주어진다. 독자와 나 사이에 신뢰가 있다면 그들은 신작을 기다려 줄 것이고 그렇게 나아갈 수 있다. 왜냐면 독자는 나와 깊은 마음속을 공유하는 사이이고 우리는 공통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으니까.
마치 우직한 친구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그러나 독자가 만약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라면, 나는 안절부절 못하게 된다. 그리고 관심을 요구한다. 관심에 목이 마르게 된다. 그들이 나를 이해한다는, 날 원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싶어서 말이다.
"관심을 신경 쓸 필요도, 기대할 필요도 기다릴 필요도 없어요." 라고 지인이 말했었다. 그때에는 세뇌하듯 외우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된다.
독자는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다. 그들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들이 날 따라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내 글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그들의 몫이다. 내가 하나하나 세어보고 확인한다고 해서 나에게 좋은 것도, 그들에게 좋은 것도 없는 것이다.
결국 관심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독자는 눈에 보이는 지표가 아니라, 내가 그리는 '같은 이야기를 마음 깊은 속에 간직한 사람'이다. 곧, 내가 감동받은 소설들을 독자로 읽은 것처럼 그런 독자가 내게 존재할 것이라고 믿으며 독자를 그린다.
결론적으로, 독자란 누구인가?
- 나와 마음 속 뿌리가 이어져 있는 누군가.
- 나와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 깊은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
-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다
추신. 독자의 관심은 그의 몫이다. 그들이 관심을 주고 반응하는 건 그들의 일이다. 거기에 내가 관여해서 나에게 좋은 것도, 그들에게 좋은 것도 없다. 독자와 나는 이야기가 아니면 이어져 있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