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와 함께 하는 작가 자의식 생성기
"장편소설을 쓸 경우, 나는 우선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책상 위에 있는 것으르 깨끗이 치웁니다. '소설 외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라는 태세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뭔가를 진지하게 하기 시작하면 다른 건 전혀 못 하는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마감이 없는 번역 작업을 내가 원하는 페이스에 따라 동시 진행적으로 간간이 하기도 하지만, 이건 생활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기분 전환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47p)
'야간비행'을 하루 4천자씩 쓴 지 이제 이틀째다. 그런데 단편을 막 쓰다가 너무 재밌는 웹소설 무협을 써버렸다. 그 인물들이 머리속에서 자꾸 어른거린다.
신작병. 본작품을 하고 있는데 신작을 구성하는 걸 말한다. 이건 북마녀 유튜버한테도 듣고, '재벌집 막내아들'의 원작 웹소설 작가의 작법서에도 써있다. 심지어 내가 그걸 어디다가 옮겨서도 써놓았다. 그들이 말하는 건 한 마디로 '지금 하던 거나 잘 해라.'라는 말이다.
오늘은 동시집필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
12. 동시집필은 정말 불가능할까?
"캐리어의 초기 단계 때의 몇몇 예외를 별도로 한다면 (당시는 아직 나 자신의 집필 스타일을 확립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얼마간의 시행착오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소설을 쓸 때는 소설만 썼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48p)
"장편소설을 집필하는 긴 기간 동안에 대체 어떻게 먹고사느냐, 라고요. 이 자리에서는 어디가지나 나 자신이 일해온 시스템에 대해 말하는 것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48p)
이렇게 확신하지 못하는 하루키, 오랜만이다. 워낙 그가 중립을 추구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두 번이나 "이건 내 스타일이다."라고 말한 건 아마 이 부분이 유독 그럴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은 동시집필의 달인이다. 또 집필스타일은 워낙 사람 수만큼 많으니까 뭐가 맞다 아니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개인적으로 나에게 "동시집필은 정말 불가능할까?"를 물어보고 싶다.
1. 쓰고 싶은 게 많은 때와 다른가?
'쓰고 싶은 게 많다면?' (10화)에서와 결이 비슷하기는 하다. 그러나 다른 점이라면 마음이 아직 뜨끈하고 몸이 달아오른다는 것이다. 쓰고 싶어 죽겠다.
2. 나는 정말 그 작품을 지금 쓰고 싶은 게 맞는가?
그러나 사실. 진실을 말하자면, 아마 이제 하루키가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으로 일본을 떠났던 게 1980년대 후반인데 그대는 역시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했습니다. 나는 상당히 겁이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역시나 배수의 진을 친다고 할까 돌아올 길을 끊어버리는 식의 결심이 필요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149p)
이 말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1)그가 집필 시에 한 작품만 집필하는 이유는 그의 스타일 때문이다.
2) 그 때문에 해외에서 집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유는 잡일이 안 들어오고 잡음이 안 들리기 때문이다.
3) 그러나 처음 일본을 떠날 때, '이렇게 해서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떠난 이유는 '돌아올 길을 끊어버리는 식의 결심'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결국, 축약하자면 글을 잘 쓰기 위해서 '돌아올 길을 끊어버리는 식의 결심'을 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중요하게도 '이렇게 해서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하고 불안해했다고 한다.
나도 불안하다. 하루키는 생업이 걸려있어서 '이렇게 해서 정말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불안해했다. 난 뭔가 '최선을 다해도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도 있고, '원하는만큼의 퀄리티가 안 나오면 어떡하지?'하는 불안함도 있다. 최선을 다해도 최고가 나오지 않는다면, 가성비 좋게 쓰고 싶은 마음이다. 그렇다고 써 둔 무협 웹소설 글이 가성비가 좋다는 확신도 없다. 웹소설 어려우니까.
결국 나는 정말 그 작품을 지금 쓰고 싶은 것도 분명 있겠지만, 또, 빠져나갈 길을 만들고 싶을지도 모른다. 불안해서.
결국 하루키가 일본을 떠나 집필을 하는 것처럼, 나도 한 작품만 집필하는 게 '돌아올 길을 끊어버리는 식의 결심'이 될 수도 있다. 돌아올 길을 끊어버리는 것. 불안해하지 않고 집중하는 것. 결과를 걱정하지 말고 순간을 즐기는 것. 어쩌면 다른 일들과도 맥락이 비슷한 것 같다.
무언가 현상의 중심이 불안이라는 건 정말 짜증나는 일이다. 인간이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통의 원인이 결국 감정이라고 알게 될 때, 나는 약간의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심리학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다시 생각한다. (아무래도 자의식 생성기라 그런가?)
3. 나는 두 작품을 완벽하게 동시에 쓸 수 있는가?
쓰면 쓸 수도 있겠다. 하루 4시간 두 작품 각자 4천자, 총 8천자 집필하기.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하고 싶지 않다. 왜냐면 나는 심리학이 전공인 걸? 문창과 전공이면 모르겠지만.
이것도 마찬가지로 가성비 신조인데 인생의 폐를 끼칠만끔 글에 진심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심리학을 후회없이 최선을 다해 공부하느냐? 그것도 지금 아직 달성은 못하고 가는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최선을 다해, 후회없이 공부해야지 다짐한다. 결국 이렇게 심리학을 또 내 안에서 발견했으니 남들이 일구어낸 학문을 열심히 배워보자. 화이팅. 할 수 있다.
4. 나는 성공하고 싶은 건가?
결국 실패라는 키워드가 날 붙잡는 거다. 두 작품 중에 뭐가 더 성공할지 저울질하기 때문이다. 실패와 성공. 그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다. 약식으로 내리자면, 솔직하게 내가 지금 생각하는 실패란,
'시간 낭비'다. 이 시간들이 다 날아가는 거다. 어떤 결과도 만들지 못한 채로 날아가는 것이다.
성공이란, '결과'다. 공모전 당선이거나 계약이다. 둘이 같은 말이긴 하다.
소설->성공으로 향한다면, 나는 성공하기 위해 글을 쓰는가? 아니다. (자꾸 철학적으로 가게 되는데 ㅠ) 글은
결론적으로, 소설을 왜 쓰는가?
-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이해받으려고 하지 않는 나를 이해받기 위해서
- 이해받았던 순간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 나를 치유하고 보정하기 위해서
-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좋은 세상' 혹은 모험/재미/흥분을 느끼기 위해서
(소설을 왜 쓰는가? 1화)
이렇기 때문에 쓴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쓸 수 있나?
- 쓸 수 있다. 내가 의미있는 것을 만든다고 믿는다면 말이다.
- 또 그 의미를 평가해주는 독자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 애초에 글 같은 거 안 써도 살 수 있다. 쓰기 싫으면 안 써도 된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쓸 수 있나? 4화)
독자란, 대중과는 조금 다른 말인 것 같다. 독자란,
- 나와 마음 속 뿌리가 이어져 있는 누군가.
- 나와 공통의 이야기를 마음 깊은 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
- 만족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다
(독자란 무엇인가? 8화)
이 말들에서 '결과', '공모전 당선'이란 단어는 없다. 있는 것이란 '이해', '치유', '보정', '재미', '흥분', '의미', '공통의 이야기', '마음의 뿌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간낭비'는 평소에 그냥 한다. 유튜브만 안 봐도 한달에 원고 500매가 나올 것이다. 나는 그저 불안한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냥 범인일까봐.
그러나, '재능'이라는 말도 여기에는 없다. 애초에 하루키는 재능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뛰어난 소설 한 편을 써내는 것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그러나 소설을 지속적으로 써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려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특별한 자격 같은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마도 '재능'과는 좀 다른 것이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9p)
"게다가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 (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그런 사람을 나는 물론 한 사람의 작가로서 당연히 마음을 활짝 열고 환영합니다. 링에 어서 오십시오."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29p)
힘이 쭉 빠지는 이야기다. 하루키의 '소설 한 편을 쓰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에 일단 기분이 확 상해버렸다. 하지만 또,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 (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에서 힘이 쭉 빠진다. 힘을 빼는 건 좋다. 성공이니 실패니, 재능이니 범인이니.
'애초에 소설 같은 건 쓰지 않아도 (혹은 오히려 쓰지 않는 편이) 인생은 얼마든지 총명하게, 유효하게 잘 살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하루키 앞에서는 들이밀지 못한다. 그리고 맞는 말이라서 더욱 그렇다.
한겨레 강의에서 소장님이 재능은 3년 정도는 써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3년을 썼다면 재능이 없어도 그보다 더한 무언가가 있는 것이라고 했다. 꾸준히 쓰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브랜든 샌더슨은 일단 10년을 써야 뭐가 되도 될 거라고 했다. 웹소설 작법서에서도 10년은 쓸 생각을 하라고 했다. 재능이란 일단 해봐야 아는 것이라고.
한겨레 강의에서 다른 선생님은 '이게 재능이죠.' '이건 재능에 맡겨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뭐만 하면 '이거는 재능의 문제입니다.'라고 말해서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이러려고 내 10만원을 쓴 것인가, 재능의 문제면 이걸 왜 듣고 있는가, 라고 생각했다. 사실 브랜든 샌더슨이 '우리가 배우는 이걸, 천재는 숨 쉬듯이 하고 있다.'라고 해서 이미 열이 받았었다.
그래, 재능있는 자는 분명히 있다. 나는 범인에 불과할지 모른다. 10년을 써도, 3년을 써도, 이번 공모전에서도, 투고에서도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설을 쓴다. 왜냐면
'그래도 쓰고 싶다, 쓰지 않고는 못 견디겠다, 라는 사람이 소설을 씁니다. 그리고 또한 지속적으로 소설을 씁니다. '이기 때문이고,
-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이해받으려고 하지 않는 나를 이해받기 위해서
- 이해받았던 순간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싶어서
- 나를 치유하고 보정하기 위해서
- 현실에서 느낄 수 없는 '좋은 세상' 혹은 모험/재미/흥분을 느끼기 위해서
난 도저히 위에 것 없는 세상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살라고 하면 살 수는 있겠지만. 내게 허락된 이상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오늘만 해도 글로 써야 생각이 정리가 되고 감정이 정리가 되는데. 소설이라는 형태로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그 무궁무진한 치유법을 '실패했으니 쳐다도 보지 않겠어! 난 루저야! 글은 평생 안 쓸거야!'라는 마음으로 외면하기에는 난 이미 치유법에 너무 빠져들었다.
루저는 무슨 루저. 그런 건 애초에 없다. 행복하면 되지.
결론적으로, 동시집필은 정말 불가능할까?
- 가능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 도망갈 길을 만드는 건 아닌가?
- 성공하지 못할 거란 불안함은 없는가? 아니 애초에 '터치'가 아닌 결과를 위해 쓰고 있지는 않은가?
- 지금 글을 쓸 기회를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는가? 감사하면 집필이 즐거워진다.
- 돌아갈 길을 끊어버리는 식의 결심이 불안함을 없애준다.
- 불가능하다. 나는 지금 인생 최고 재미인 삶을 사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글만 쓰면서 살기에는 내 가능성이 심하게 많다.
- 재능이 없는 게 들통날까봐 불안해하는 건 아닌가? 괜찮다. 재능은 쓰는 지속력도 재능이고 '이해', '치유', '보정', '재미', '흥분', '의미', '공통의 이야기', '마음의 뿌리'가 근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