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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다정한 말들을 모았다 (11편)

나도 시를 쓴다

by 바다


마법의 성

오늘 밤에는 나의 손을 잡고 마법의 성으로 가주세요

무엇도 생각하지 않도록 눈 앞에 하얀 마법 불꽃을 터뜨려요

오늘의 버스 카드 잔액과 통장 잔액 같은 건 그냥 숫자가 되버리도록, 날 데리고 하늘을 같이 걸어요

오늘 밤에는 내 눈을 꼭 가리고 입에 따듯한 키스를 해주세요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 받았던 순간과 결국 상처받았던 마음 같은 건 생각나지 않도록, 날 가득 웃게 해줘요

영원히 알 수 없는 인간의 마음 같은 걸로 울지 않도록, 빈틈없이 나를 꼭 안아줘요

오늘 밤에는 당신의 우울을 내게 보여주세요

슬퍼하는 순간도 아깝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보여주려고요

울어도 괜찮다고 내 옆에서 내 등을 두드려줘요

오늘 밤에는 바꿀 수 없는 학창시절 속에서 내 손을 잡아줘요

숨 죽여 울었던 그 화장실 문 밖에서 나를 기다려줘요

내 흐르는 눈물을 차가운 손 끝으로 닦아줘요

오늘 밤에는 글을 써요

온갖 잔재주로 이 환상을 당신에게 실감나게 보여줄게요

감상해줘요

내가 만드는 모든 것들을

그리고 위로해줘요 당신 자신을

사랑의 비유

주황색 데이지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은 사랑.

그 연약한 꽃잎들이 부드럽게 살랑거리는 것 같은 사랑스러움.

한순간에 꺾일 수 있는 연약함

초등학생이 던진 흙 묻은 축구공 하나에 뭉개질 수 있는 데이지 꽃밭처럼 연약한 사랑

그런 사랑 그리고 그런 사람

내가 웃을 때는 그렇게 여리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고 봐주길

있죠, 난 꽃을 싫어해요

줄기 잘린 꽃을 보면 그 죽음이 공허해보여서요

고작 장식을 위해 꺾인, 그 가벼운 생명을 증오해요

가는 줄기에 달린 비대한 꽃봉오리가 멍청해보이잖아요

어제는 산꼭대기에 핀 작은 주황색 꽃을 보았어요

몇 달 전에 봤던 작은 점 같은 꽃들이 이제는 더 많이 피었더군요

사랑스러웠어요

누가 보지 않아도 여전히 그 초록 산은 살아있다고 소리치니 말이에요

그 꽃도 지겠죠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닐 거랍니다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일 뿐

산이 살아있는한 꽃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요

하지만 꺾인 꽃은 지고 나면 버려야 해요

아름답던 꽃잎은 초라하게 마르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생명의 비명소리 같지 않나요?

나는 가장 아름다운, 누구의 것도 아닌 꽃이랍니다

내 인생은 저 커다란 산처럼 살아 숨쉬고 있어요

그 위로 자연스럽게 꽃이 피고 집니다

그러나

꺾을 생각하지 말아요

산을 옮길 수 없다는 건 당신도 이미 알고 있으니.

행복

수많은 비유도, 묘사도, 설명도 무용지물이죠

내 옆에 있어줘요

이 순간에 나와 눈을 맞춰요

빈틈 없이 안아줘요

완벽하게 쓰여진 대사는 필요없어요

멋없는 농담도 좋아요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말아요

믿을 수 없는 말로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

사진도, 글도, 영상도 이 순간을 영원히 담을 수는 없어요

다만 내 눈은 담을 수 있죠

내 어깨를 안은 이 적당한 힘도 언젠가는 잊어버리겠지만

지금 내가 완벽히 당신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는,

그리고 두고두고 다시 돌아볼 행복일테니.

<글쓰기에 관한 내 다짐이자 시>

우물에 돌 하나 풍덩 떨어지네

어린 아이 조르르 와서 우물 내려다보며

돌 하나면 우물 다 찼을까 하고 개구지게 소리쳤지

아니 아니 돌 하나로는 우물 못 막지

옆에 개구리가 대답했어

다시 조약돌 몇 개 주어 통통통 우물에 넣고 아이가 소리쳤지

이 정도면 우물 다 찼을까

아니 아니 더 큰 돌을 가져와야지

개구리가 아이를 비웃으며 우물 위에서 대답했어

아이 또 다시 돌 주어 오면 개구리는 고개만 휘저어

더더욱 큰 돌 더더 많은 돌 아니지 아니지 더 열심히 찾아봐

아이는 이제 웃지도 않아 땀을 뻘뻘 흘리며 돌을 날랐지

이 정도면 됐을까 하고 지쳐 물어보자

개구리는 샐쭉 웃으며 고개를 갸웃거렸어

가만보자

아무래도 이건 우물이 아니라 호수인가

아니 호수가 아니라 바다인가

얘 너 이 정도 돌로는 다 못 채우겠어

당장 일어나 더 많은 돌을 가져오렴

잠깐 바닥에 철푸덕 앉아 쉬던 아이는 대답하지 않았어

대신 저 개구리를 훠이훠이 내쫓았어

우물을 들여다보자

저 시원한 냉기가 아이의 땀을 말려주고

끝없는 우물의 깊이는 아이의 소리를 메아리쳐주고

반짝이는 물빛은 아이의 얼굴을 비쳐주었지

돌을 들여다보자

맨들맨들한 돌은 아이의 온화한 성품을 닮았고

모난 돌은 아이의 정의로운 성격을 닮았고

거친 돌은 아이의 도전정신을 닮았지

아이는 이제 신중하게 돌을 골랐어

그리고 우물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어

손에 돌을 들고서 우물에 퐁당 내려놓았지

저 돌이 우물 어디에 있을지

우물을 다 채우려면 얼마나 많은 돌이 필요할지

이제 궁금하지 않아졌어

아이가 조용히 우물에게 말해줬어

안녕 우물

내 돌 참 예쁘지?

너 가져 선물이란다

그리고 아이는 우물 밑으로 가라앉는 돌과 물빛을 한참 바라보았단다

물.

비가 온다 툭 투욱 툭

빗줄기는 굵어지고

물방울은 톡톡 터지던 것이 툭 투욱 터지며

내 마음도 톡톡 건드리던 것이 이제는 적셔버리며

그 비가 소나기일까 장마일까 생각하다

이미 젖은 옷 안에서 나는 뜨거운 몸을 움직여본다

온 건물이 다 물빛인데

그 위 웅덩이에 비친 신호등 불빛마저 번져 흐트러진다

물 찬 운동화 안에서 발가락을 움직여보면

분명히 움직이는 것은 내 몸의 일부분인데 왠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도시 위로 환상이 쏟아부어지는 장마 기간. 나는 긴 꿈 속을 걷듯 거리를 걷는다

체온

우리 아주 영 모를 때가 오면

서로를 봐도 별 감정이 안 들게 되면

그때는 그저 따스한 체온만 안겨주는

두 명의 36.5도가 되어 서로를 안아보자

제목: 향수와 연어

연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중에서 몇몇이 빠져나와 다른 강물로 갔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했고 따듯했다

새로운 강은 신났고 여지없이 그 강은 내 마음속을 휩쓸고 갔다

파도가 쓸려간 내 마음에는 아직 채 물을 따라가지 못한 물고기가 퍼덕거린다

펄떡펄떡 움직이는 아가미와 꼬리

그것을 그대로 마음에 두고서 나는 다시 새로운 강물로 나아간다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던 다른 연어들을 가끔 그리워하지만

나는 안다

모든 물은 한 곳으로 통한다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만날 수 없는 것도, 함께 하지 않는 것도 아님을

속도위반

인생에 속도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놓쳐버린 것들을 안타까워할 뿐이지

웃어도 보고 울어도 볼 젊은 시절이 사라진 것에 미리 살아본 이들이 울컥 분통해하고

이 어린 것들이 또 어린 것을 책임진다니 눈앞이 노랗게 돌고

돈의 무서움도 모르고 죽을만큼 일해본 적도 없는 고운 아들딸들이 하루 아침에 그 노고를 감당한다니 속만 타는 거 아니겠나

답이야 없지

내가 그들로 살아보지 않았으니

물론 행복이야 있겠지

인생사 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아니겠어

근데 이미 뻔한 길

안 걸어가게 하고 싶은 이 사람 속 좀 생각해주게

목 터져라 부를만큼 사랑한다 내 아들딸들아

그쪽으로 가지마렴

아들아 내 딸아

가지마렴

가난의 레시피

베이킹은 아주 예민하다

레시피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아주 약간의 온도 아주 약간의 시간으로 아예 다른 것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가난이 빵이라면 이 반죽을 만들 때

아차, 하고 사랑을 가득 부어버렀으면 좋겠다

배는 굶어도 마음은 풍족할 수 있도록

아이구, 하고 희망을 너무 많이 뿌리면 좋겠다

눈 앞에 장애물 너머를 볼 수 있도록

힉, 하고 반죽을 너무 오래 오븐에 넣었으면 좋겠다

어떤 어려움에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마음이 되도록

요리는 엉망진창이 되겠지만

가난은 더 이상 딱딱한 마른 빵이 아닌

푹신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당신이 한 입 배어먹을 수 있도록

당신을 옆에서 지나쳐가는 그저 행인처럼

혹은 당신과 즐겁게 대화하는 친구처럼

가난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덤비지만

가난을 이긴 사람을 사람들은 잘 보지 못한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웃으며 당신 옆에 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 그들의 과거를 캐묻지 말기를

엉망진창이 된 요리처럼 이미 잘못된 가난의 레시피

그들이 만든 행복의 레시피에 어떤 그늘도 씌우지 말기를

사건의 지평선

나의 별이 오늘 떨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별은 내 안에서 고요하게 멸망했으므로

나의 행성이 오늘 별의 시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모두가 알았다

그 행성을 내가 기록했으므로

나의 우주를 너에게 알린다

내 우주에 너를 초대한다

너는 이제 나의 우주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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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는 보통 시를 쓰면 글에 대한 시를 쓴다. 글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내가 글에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시는 좀 더 솔직해지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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