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마

이 패배감을 글로 남겨두어 기억하고 싶었다

by 배작가

어제 새벽부터 라나가 보고 싶어서 horse riding 유튜브 채널을 넋 놓고 보고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나는 황산나래 등 위에 올라타 있었다. 이미 세 번 연속 기승한 말이라 내 몸에도 제법 힘이 빠졌다. '잘할 수 있지?' 쫑긋쫑긋, 내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황산나래와 한번 신나게 뛰어볼 작정이었다.


오늘은 비가 왔다. 덕분에 야외 승마장을 이용해야 할 기승자들이 실내 승마장에 옹기종기 모였다. 그리 넓지 않은 대마장에 말이 열댓 마리 모인듯했다. 나는 정방향으로 도는데 역방향이 정방향인 듯 도는 말이 더 많았다. 개판도 아니고 말판이었다.


가속도에 공포를 느끼는 병은 뭐라고 부르나. 뻥 뚫린 고속도로를 멈출 줄 모르고 달리는 차는 내게 공포다. 택시 기사님께 최대한 빨리 가주세요, 해놓고 너무 빠르다며 친구 팔을 터질 듯이 잡아 같이 탄 친구가 부끄러워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끔, 지하철 조차 그 속도를 내가 인지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어려워지는 일이다. 그래서 말이 일정 속도 이상을 내면 무섭다. 다른 말이 역방향으로 내게 질주하는 건 더 무섭다. 그런데 왜 말을 타겠다고 설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분명 정방향으로 돌고 있었다. 그때, 보라색 다리 띠를 찬 말이 역방향으로 황산나래를 향해 돌진했다. 그 보라돌이는 머리를 안 쳐들고 달려와서 상황 파악이 안 되고, 되려 황산나래가 놀라 일어났다. 말은 보통 4개의 발을 땅에 붙이고 뛰어다니는데, 사람인 양 앞다리 2개를 들고일어났다. 무서웠다. 허벅지 안쪽 근육에 본능적으로 힘이 꽉 들어갔다. 그 찰나의 순간에 나는 여유롭게 도산공원 벤치에 앉아 '바람 좋다' 하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죽기 전 파노라마가 펼쳐진다면 이런 형상일 것이다. 나도 이성을 잃고, 워-하며 고삐를 당겼다. 황산나래는 당긴 고삐에 더 놀라 미쳐 날뛰었다, 가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흥분한 말을 진정시키며 나도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보라돌이가 다시 황산나래 곁으로 왔다. 황산나래가 또 일어났다. 사람인 줄 알았다. 두 번째 일어났다고 덜 무서운 게 아니다. 더 무서웠다. 정말 무서웠다. 허벅지 안쪽 근육에 경련이 올 정도로 말을 안았다. 낙마 또한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허벅지여, 너는 자랑이자 사랑이다. 말을 진정시키며 대마장을 빠져나오는데 눈물이 찔끔 났다. 인생에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괜히 서러웠다. 아무리 무서워도 기승하는 동안은 말을 타야 하는 것. 무섭다고 걷기만 하면 발전이 없는 것. 낙마할 뻔 해도, 혹은 낙마해도 다시 말을 타야 하는 것. 승마에서 인쒱을 배운다.


울먹거리며 오늘따라 얘 왜 이러냐고 교관님께 물었다. 오늘 따라가 아니라 말이 기승자를 못 믿어 그런 거라고 하셨다. 기승자가 말을 보호하고 조정할 수 있음을 못 믿으니 겁 많은 황산나래가 자기에게 달려오는 말을 알아서 피하고 괜히 일어서고 발로 차고 오버하는 거라고. 말이 기승자를 믿으면 기승자가 조정하는 대로 움직이는 거라고. 맞는 말이다. 그래, 믿음을 못 준 내 탓이다. 낙마해서 다쳐도 허벅지에 힘을 못준 기승자 책임이고.


보통 승마가 끝나면 얼음물 한잔 마시고 집에 쌩-가는 맛이 있다. 오늘은 떨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두 시간은 말을 보며 앉아있었다. 그런 내가 안타까우셨는지 사모님이 조용히 떡을 주고 가셨다. 떡 한입, 물 한 모금 마시며 내 속보 속도보다 5배쯤 돼 보이는 속력으로 여유롭게 말을 타는 교관님을 보았다. 나도 밥 먹고 말만 타면 저렇게 탈 수 있을까. 내가 유달리 말을 예뻐하니까, 교관님께서 아직 어리고 신체조건이 좋으니 전문적으로 타보라고 권유하셨던 게 생각났다. 나는 그게 처음은 립서비스인 줄 알았다. 그런데 매번 그 얘기를 하시니 정말 그래 볼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을 계기로 나는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말과 신경전이야 기승 때마다 하지만 이렇게 완패한 날은 처음이다. 이 패배감을 글로 남겨두어 기억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 아침부터 황산나래를 타러 가니까, 아직 패배한 건 아니다. 내 인생 어느 날 완패한 기분이 들더라도, 다음날 아무렇지 않게 황산나래를 타러 가듯 집을 나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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