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다낭, 저녁이 되니 날씨가 선선해졌다. 산책을 하며 동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데, 한 호텔건물 주차장입구에서 경비 옷을 입은 아저씨가 옥수수를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출출하던 차에 좋아하는 옥수수를 보니 군침이 돌았다.
경비아저씨께 부탁하여 옥수수 오토바이를 불러 세웠다.
커다란 스치로폼 박스안에 가득한 옥수수는 겉옷까지 모두 입고 있었다. 오토바이 아저씨는 옥수수 치마를 살짝 들춰 속 살을 조금 보여주었다. 실했다. 나는 옥수수의 거친 바깥옷에서 연한 속옷까지, 의식을 치르듯 하나 하나씩 벗겨냈다. 드디어 윤기나는 수줍은 맨 살이 나왔다. 노르스름하고 촉촉한 옥수수알들은 하나의 흐트러짐없이 탱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약간의 흥분을 느끼며 커다랗게 한 입 베어 물었다. 토도독! 입속에서 터지는 알맹이는 싱그럽고 부드러웠다.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옥수수 맛이었다. 소금과 설탕 넣고 삶은 옥수수보다 훨씬 담백하고 고소했다.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옥수수를 먹는다.세로로 길게 몇 줄 하모니카를 불기도 하고,빙글빙글 돌리면서 먹기도 하고,한 알 한 알 손으로 떼서 먹기도 한다. 남편은 옥수수 알갱이가 치아에 끼는 게 싫다면서 알갱이만 톡톡 빼먹었다. 지저분하게 먹는다고 싫어했는데 요즘은 나도 가끔씩 알갱이만 빼먹기도 한다. 다 먹은 옥수수자루를 보면 수확을 막 끝낸 들판 같다. 나는 아무리 배가 불러도 옥수수만 보면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옥수수를 먹으면 맛도 좋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더 좋다. 찐 옥수수는 여유로운 음식이다. 옥수수를 사이에 두고 정담을 나누거나, 함께 시간을 나누거나, 밥과 밥 사이 시간이거나, 입이 궁금할 때 느긋하게 먹는다. 배가 고파 허겁지겁 먹거나, 시간에 쫓겨 급히 때우거나, 예의를 갖춰야 한다 거나, 기쁨이나 슬픔에 넘칠 때 먹는 음식은 아니다. 그냥, 먹는 간식이다.
어릴 적 할머니와 살던 시골집에는 밭이 없었다. 논은 많았지만 밭이라고는 바깥마당에 붙은 남새밭이 전부였다. 할머니는 남새밭에 상추, 가지, 오이, 깻잎, 고추 등 반찬이 될 만한 푸성귀만 심었다. 나는 유난히 옥수수를 좋아했지만 우리집에서는 옥수수를 심지 않았다. 옥수수밭이 있는 동네친구가 부러웠다. 여름이 되면 산등성이에 있는 친구집에 자주 놀러갔다. 친구네 쪽마루에는찐 옥수수와 고구마가소쿠리에 담겨 있어 하나쯤 얻어먹기 쉬웠기 때문이다. 친구는 우리집 광에 가득한 쌀을 부러워했지만, 나는 옥수수가 풍성한 그 친구집을 부러워했다. 우리 할머니에게는 ‘그냥’이 없었다. 쌀만이 값어치가 있었고, 쌀이 풍성한 우리집에 옥수수는 가치 없는 잡곡에 불과했다.
나는 동네를 호령하던 서슬 퍼런 할머니의 기세에 눌려 애어른처럼 행동했다. 옥수수가 먹고 싶다는 말은 애들이나 하는 말 같았다. 착하고 예의 바르고 어른스러운 아이라는 칭찬에 가려진아이의 속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갖고 싶다고, 먹고 싶다고,하고 싶다고,하기 싫다고 말하는 일곱 살 아이는 꼭꼭 숨어버렸다.
남편과 함께 여행을갔다. 관광지로 향하는 길목 ,작은 화로위에서 옥수수가 고소한 불냄새를 풍기고 있었다.당연히 내 발걸음은 옥수수를 향하고 있는데 따라오던 가이드가 시간이 없다며 나를 재촉했다. 할 수 없이 일행에 합류하고 보니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는데 멀리서 남편이 옥수수 한 개를 흔들며 허겁지겁 달려오는 것이보였다.
“당신은 애도 아니면서 옥수수만 보면 그렇게 안달을 하냐! 자 옥수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