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나온 Sep 06. 2024

낙원 설계도

낙원 설계도 


신이 나에게 낙원에 드는 것을 허락하겠다 하시면   

   

나의 낙원엔 산과 바다가 있을 것이다. 하와이나 발리 같은 호화로운 휴양지의 모습은 사양한다. 우리네 산에서 그간 산불로 전소된 나이 많은 나무들을 모아 다시 울창한 숲을 이루겠다. 산속으로 난 길을 걸어 올라가 탁 트인 정상에서는 집채만 한 파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리고 꽃이 있을 것이다. 모든 들꽃이 좋으나 달걀 프라이를 닮은 소박하고 예쁜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핀 꽃밭이 있으면 좋겠다. 끝없이 끝없이 펼쳐진 흰 물결 사이로 나비가 날아드는 모습을 홀로 앉아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다.     


가톨릭 신자인데 낙원을 고즈넉한 절의 형태로 꾸미겠다 아뢰면 신께서 언짢지 않으실까 싶기도 하지만, 나의 신이 그렇게 속 좁으실 리 없으니 내 고향의 전등사를 생각하며 안락한 거처를 설계한다. 많은 나무가 있겠지만 특별히 앞마당의 배롱나무는 매끄러운 광채를 뽐내며 구불구불 손을 뻗어 붉은 꽃을 피우고, 황금사철나무 여러 그루가 정원사의 손을 타지 않은 채 마음껏 하늘 향해 자라게 할 것이다.      


 조금 쑥스럽게 요구하건대 그곳엔 내가 (다 읽지도 못하며) 모으고 있는 민음사 세계문학 전집이 있을 것이다. 나초도 필요할까 싶지만,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을 테니 향긋한 얼그레이나 루이보스 차만 있으면 충분하겠다. 책을 읽다 꾸벅 졸게 되면 언제든지 누워 잠을 청하고, 그러다 일어나서 다시 책을 읽겠지. 


방 하나엔 정선의 몽유도원도만 모셔놓을 것이다. 반가사유상을 고요하게 바라볼 수 있는 사유의 방도 필요하겠다. 또한 샤갈의 그림이 있으면 좋겠다. 베르나르 뷔페의 날카로운 작품들은 낙원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망설여지지만, 내게 전율을 주는 뷔페의 그림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긴 나의 낙원이니까.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웃으며 에르메스나 샤넬은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깔깔대며 롤스로이스나 부가티는 줘도 싫다 할 것이다(구름을 타고 다니겠냐고 한다면 조금 솔깃할 것 같다).   

  

무료하다 느낄 즈음엔 음악이 흐를 것이다. 그러면 온몸으로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듣는다. 모든 곡을 빠짐없이 들을 것이다. 그다음엔 위대한 음악가들이 연주한 같은 곡을 차례차례 들으며 같은 곡의 다른 맛을 정성껏 음미한다.   

   

햇살 좋은 때엔 숲속을 걷고 싶다. 호젓한 오솔길을 걸으며 내게 무심한 새와 꽃의 말을 알아듣고 즐거워할 것이다. 오솔길만 걸으면 충분치 않다. 치악산같이 가파른 등산로를 오르며 기암괴석의 장관을 감상하리라. 숨을 헐떡이더라도 호기롭게 정상에 올라 발아래 구름을 내려다보며 바람과 어울리는 것 또한 낙원에 어울릴 일이다.     


낙원의 주인이 비를 좋아하니 비가 자주 내린다. 비가 오면 요가를 하며 몸을 깨운 뒤 피아노를 연습하자. 배우다 실패한 우쿨렐레도 연주하면 실력이 늘겠지. 비가 오면 다리가 쑤실 테니 침대에 누워 솜씨 좋은 분께 마사지를 받으면 아,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나의 낙원이 타인의 노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마사지 선생님은 다시 돌려보낸다. 아쉬운 마음으로……. 안녕히 가세요…….


 모든 계획을 실천했을 때 하루해가 질 것이다. 보름달도 좋고 반달도 눈썹달도 아름다우니 어떠한 달이라도 좋다. 나를 찾는 휴대전화 메시지도, 해치울 설거지도, 오늘의 속상함과 후회도, 내일 할 일에 대한 걱정 따위도 하나 없다. 의무와 책임 없이 고유한 나의 낙원은 다른 이의 낙원이 될 수 없으니 나는 혼자다. 낙원에 드는 것은 철저히 홀로 존재하는 것. 이 순수한 음풍농월을 즐기리라. 


무한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떠오른 달. 끝없는 어둠 속에서 욕망과 자아를 투명하게 길어 올리다 계수나무 달 토끼를 발견하고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안아달라고 조르는 두 아들의 달콤한 군내, 단단한 남편의 손, 내 어머니 아버지와 마주하는 소박한 저녁 식사.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머물 수 있는 다른 이의 목소리가 없으니 내 목소리도 없었던 것을. 나의 두 발이 캄캄한 허공에 떠 있었다.

 그러니 그 외로움의 냄새를 맡고 악마가 찾아올 것이다. 뱀의 모습을 하고 나타나 선악과를 먹으면 더욱 지혜로워진다고 유혹한다. 나는 그것이 유한한 시간, 번뇌와 고통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도 그 과일을 베어 물 것만 같다. 그리고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책임져야 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 현실로 쫓겨나겠지.      

  낙원에게 잘 있으라 말한 뒤 문을 삐거덕 열어 나온다.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는다. 뒤돌아 다시 바라보니 그것은 나를 있게 한 고유함이었다. 그래도 낙원을 뒤로하고 기어이 내가 살던 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내 인생에 완벽한 낙원이 무엇이었는지 따지자면 그런 것은 없었다. 그런 낙원을 언제 마주할 수 있을지 꿈꿔보니 아득하기만 하다. 생을 착하게 살면 심판의 날에 낙원에 들 수 있다고? 그것은 마치 숙제를 잘하면 사탕을 주겠다며 아이를 길들이려는 미숙한 어른의 얕은 술수처럼 느껴진다. 나는 언젠가 올 낙원의 날을 위해 버티며 오늘을 사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어제는 그 자체로 반짝이는 오늘이었다.      


 그래서 다시 고쳐 써 본다. 신은 낙원을 걸어 나온 나에게 불경하다며 고난을 안겨 준 것이 아니라 낙원의 조각을 쥐여 주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낙원의 조각을 쥐고 있었다고. 지금도 아이와 남편을 끌어안고 그들의 살냄새와 생생한 질감을 통해 낙원의 조각을 만진다고 말이다.


 투닥투닥 다투던 두 아들이 축구 얘기로 다시 다정해져 손흥민 세레머니를 흉내 내는 모습에 머리가 지끈하면서도 그 장면에 n번째 낙원 조각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수북한 설거지 후 부은 다리를 주물러가며 상념을 꾹꾹 눌러쓴 이 글은 내 삶에 부치는 선명한 연애편지다.      


-24년. 1월. 31일.      

이전 04화 freew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