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내, 딸 그리고 만화가로서의 나.

다 똑같이 잘 해내고 싶은데.

by 뱅울

나의 우선순위를 찾았던 지난주. 그리고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 생에 주어진 내 역할은 세 개. 한 사람의 아내, 첫째 딸 그리고 만화가. 이 모든 걸 다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해내고 싶다는, 어쩌면 살짝 놓았던 욕심을 다시 꺼내 들고 12월이 끝나가는 지금 책상 앞에 앉았다.


사실 나는 공존할 수 없는 두 가지를 어릴 때부터 늘 꿈꿔왔다. 내조를 잘하는 아내와 일을 잘하는 커리어우먼. 어릴 땐 이 두 가지에 어떤 의문도 없이 마음속에 꿈꿔온 일들인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내 '잘'의 기준으로 이 둘을 해내려면 하루는 24시간이 아니라 48시간이어야 되겠더라고.


그런 날이 있었다. 갑자기 외주업무들이 한가득 몰아치고 수정도 한 바가지 해야 했던 날. 근데 유난히 눈에 거슬리던 바닥의 머리카락, 쌓여있는 분리수거, 어질러진 책상. 갑자기 펜을 쥐던 손에 힘이 팍 풀리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화가 난 것이다. 흉골의 깊은 곳에서부터 갑갑함이 들어찼고 목구멍이 조이는 것만 같았다. 분명 잘 해냈다고 생각했는데 피드백 해주신걸 보니 내가 이렇게 그렸다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 정해진 일정 안에 다 해내려면 손을 바삐 놀려야 할 터였는데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집구석을 보니까 내가 집정리도 못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나. 내가 원하는 집은 이런 집이 아닌데. 난 잘 정돈된 것들을 정말 좋아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됐지. 온갖 투정과 불만을 늘어놓으며 한바탕 울었다. 운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지만은 속에 갑갑함이 어느 정도 토해내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러고는 다시 펜을 잡고 '돈을 주는 일'부터 했다. 당연하지. 돈을 주는데. 그리고 다짐했다. 오늘 이거 다 끝내고 내일은 집청소만 하루종일 해야지. 하면서.


이제 와서 보니 그때 나는 두 가지를 한 번에 맘에 들게 해내려니까 화가 그렇게 났던 거다. 청소를 하는 게 힘든 게 아니고 청소를 마음에 들게 하면서 일도 밀리지 않고 수정 없이 완벽하게 처리하려고 하니까. 그래서 매일매일 무엇 하나에 미안함을 품으며 하나는 살짝 미루고 하나를 먼저 처리하는 방법으로 2024년의 나머지를 살아왔다. 어떤 날은 일이 너무 많아서 집안일을 할 여유도 정신도 없어서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을 품고 하루종일 일을 몰아쳤고, 어떤 날은 큰 맘 먹고 집안일을 전부 다 해내는 동안 업무연락을 제때 확인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엄마, 아빠가 보낸 연락을 확인하지 못하고 다음날이 되는 날도 허다했다. 그 우선순위의 기준을 돈이 되냐 안되냐로 나눈 채, 하루하루 몰아쳐서 해내느라 늘 바빴고 정신이 없었고 여유도 덜했다. 이게 유일하게 2024년을 떠나보내는 마음으로 돌아보니 드는 아쉬움이다. 돈이 그 결정의 우선이 되었다는 것도 아쉽고, 내 주변을 잘 챙겨내지 못했다는 것도 아쉽고.

tempImageLBKsLA.heic

내년을 준비하려고 지난주에 적었던 우선순위를 다시 보니 맨 위에 있는 '나와 가족들'. 다시 내 역할을 돌아보며, 모든 것들을 내가 원하는 만큼 해내는 걸 목표로 하지 말고 조금씩 챙겨나가며 내 역할들을 공존시킬 수 있도록 살아나가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문장들을 공유해 달라는 인스타스토리를 보고서 내가 가진 두 가지의 일반 문장과 혼자 늘 되뇌는 두 가지의 문장을 떠올렸다. 매일 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살고 하루하루는 최선을 다하되 인생전체는 흘러가는 대로 둘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기. 후회하지 않기와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기. 어쩌면 내 역할 세 가지를 다 똑같이 잘 해내고 싶다는 욕심은 여기에서부터 흘러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오늘이 생의 마지막인데 후회하지 않으려면 난 내가 가진 역할을 하나씩은 다 해내봐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은 눈뜨자마자 엄마의 안부를 물었다. 어제 식당을 다녀오고 소화가 안되었다던데 지금은 괜찮냐는 일상적인 안부를 보내고 9시부터 시작된 줌 모임을 하나 해내고서 일어나 청소기를 돌렸다. 그러고 다시 차를 내려와 작업실에 앉아서 업무하나를 끝냈다. 업무가 끝나고 책상을 정리하고 나선 주방으로 가서 귀리밥을 짓고 고기랑 김치를 달달 볶아 어제 장 보러 가서 얻어온 비지를 반틈 뚝 잘라 넣은 비지찌개를 끓이고 엄마에게서 받은 소고기와 어제 사온 당근, 당면, 얼마 전 게임에서 얻은 양파를 넣고 간장설탕을 넣은 소불고기를 재우며 점심준비를 했다. 남편이 나와서 얼굴을 마주 보며 비지찌개에 소불고기 배추쌈을 싸먹었다. 요즘 제일 좋아하는 순간. 그리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무한도전을 보며 푸핰핰 웃다가 다시 작업실에 와 앉아 브런치를 쓰기 시작했다.


오늘이 평소와 다른 것은, 업무를 빨리 해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난 것 하나 뿐인데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올해 내내 여유로운 마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정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했었는데 사실 그냥 나 스스로에게도 다정하기 위해 여유로움이 필요한 것 일지도.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월요일인데 웃음이 났다. 만족스러운 낮이 지나가고 있다. 내년도 오늘처럼만 여유롭고 열심이길.

tempImage1iI0dY.heic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1화나를 알기 위해 시간을 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