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배유 Oct 27. 2022

아빠는 너에게 책 값으로 일주일에 만 원씩 줄 거야.


나의 파편들을 찾아낸 후에 문득 아빠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용돈을 받지 않을 만큼 어렸을 때부터 나와 동생은 ‘서점 비’라는 제목의 용돈을 따로 받았다. 아버지의 계획이었다. 일주일에 1만 원씩 주셨고 그 돈은 오로지 서점에서만 쓸 수 있었다. 1주일에 한 권씩 살 수 있는 정도의 돈이었고 오랜만에 서점에 간 날이면 그날은 서점 털이범이 되었다. 토요일마다 현금 뭉치를 들고 서점으로 향했다. 아빠와의 여정은 나에게 소풍이었고 쇼핑이었다.


‘서점 비’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몇 가지를 풀어보자면, 아빠는 서점에서 유일하게 만화책을 못 사게 하셨다. 그땐 그게 입술이 댓 발 나올 만큼 불만이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니 현명한 규칙이었다. (대신 집에 있는 WHY 책은 실컷 읽어도 됐다.) 또 나는 항상 책의 제목과 뒷부분 설명을 보고 샀는데 어떤 날은 아빠가 내가 산 책을 미리 읽어보고 책을 봉인해버렸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 내용이 너무 유해하다고 판단돼 테이프로 책을 칭칭 감아버린 것이다. 고등학생 때 그 책을 발견하고 엄청 웃었던 일화가 있다. 제목은 <날라리 온 더 핑크>. 책에 이렇게 적어 놓으셨다.



‘이 책은 평범한 10대가 어떻게 날라리가 돼가는지를 보여줍니다. 날라리에도 삶은 있다는 관점에서는 좋은 책이나, 삶의 방향을 잡아야 할 사춘기와 그 이전에는 굳이 볼 필요가 없고 되래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성인이 되었거나, 친구 중에 가출한 사람이 있거나, 자기가 더러운 쓰레기가 되었다고 생각될 때나 읽기를 추천합니다. 결혼한 다음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며 읽으세요. 2011년 10월에. 아빠가.’


서점에서 돌아와 집에 오면 책 위에 날짜를 적는 게 루틴이었다. 년, 월, 일, 이름까지. 이름은 아마 동생 책과 내 책이 섞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겠다. 나는 23살이 된 지금도 여전히 서점 비를 받는다. 남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서점 비가 떨어져 내 돈으로 책을 살 때면 진짜 ‘어른’이 됐음을 느낀다. 예전에는 서점 비가 없으면 그냥 땡이었는데, 이젠 서점 비로 책을 몰아 사고 나서도 읽고 싶은 책이 등장하면 내가 멋지게 결제해버린다.


아빠께 왜 서점 비를 따로 주었냐고 여쭤보고 싶어서 입을 뗐다. “아빠 근데 서점 비..”라고 하자마자 아빠는

“이젠 가불 안돼!”


끙.. 아니, 그게 아니라..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봐. 아빠는 왜 서점 비를 따로 줬어? 왜 그런 시스템을 도입한 거야?”

“음… 너네가 점점 자라면서 무언가를 사고 싶어 하고 소유하고 싶은 욕심이 생길 거란 말이지. 구매하고 소유하는 것을 배우게 하려고 그랬어. 우리가 모든 걸 다 사줄 수 없고 너희가 모든 걸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 랄까.”

“나는 책을 좀 읽으라고 그런 줄 알았는데. 내 예상과는 다르네?”

“물론 그 점도 없진 않았지. 다른 것에 대해서 욕심부릴 바엔 책이 갖고 싶게끔, 책이 사고 싶게끔 만들었어.”



서점에서 나는 책을 위주로 사면서 가끔 남은 돈으로 책갈피나 연필을 샀다. 동생은 책보다는 서점에서 파는 어려운 퍼즐들을 샀다. (전문 용어가 있는데 기억이 안 난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어느 정도 자란 후, 그러니까 서점에 가서 사는 거라고는 문제집 밖에 없게 됐을 때, 아빠는 서점 비를 모아 각자 필요한 무언가를 사는 것을 허락해주셨다. 예를 들면 동생의 비싼 베이스 기타, 내가 그림 그릴 때 쓸 라이트박스와 같이 아빠가 봤을 때 서점 비로 사용해도 괜찮을 것 같은 물건들에는 서점 비로 돈을 보태주셨다. 아빠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날짜가 적힌 옛날 책들을 찾아봤다. 사기만 하고 읽지 않은 것들이 태반이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아빠의 계획은 엄청난 성공이다. 책을 거의 쓸어 모았으니 말이다. 지금도 그 무엇보다 책에 대한 소유욕이 가장 강하다. (옷, 필기구, 전자기기보다 더)



동생 방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와, 이건 나 5학년 때 샀네. 읽지도 않을 거면서.. 진짜 갖고 싶어서 샀구나.”라고 말했는데 아빠는 그 책 기억 안나냐면서 내가 잊고 있던 하나의 일화를 말해주셨다. 옛날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렴풋이 추억이 떠올랐다.


중학생 시절, 몇 학년인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우리 반 교실은 도서관 앞에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려면 도서관 앞 게시판을 지나가야 했다. 어느 날, 점심시간 복도에서 놀다가 도서관 게시판에 붙어있는 퀴즈를 발견했다. 랜덤으로 책 내지 중 한 페이지를 붙여 놓고 책 제목을 맞히는 퀴즈. 대부분의 것들은 유명하거나 교과서 작품이었기에 쉽게 맞출 수 있었는데 딱 하나, 아무도 못 맞춘 책이 있었다. 근데 그걸 내가 맞췄다. 제목은 <고양이 전사들>. 그 당시 나는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도 못 맞춘 <고양이 전사들>을 내가 맞췄다고. 사실 다 읽지 않았는데 책 문체랑 이름들을 보니까 생각났다고. 사서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냐고 크게 놀라셨고 나는 덤덤하게 “그 책 우리 집에 있어요.”라고 말하니 더욱 놀라셨다고 한다. 시간이 지난 지금도 초등학생 때 산 <고양이 전사들>은 읽지 않았다. 내 이름이 적혀있지만 의외로 동생의 관심을 끌어 동생이 읽고 나머지 시리즈를 사놔 책장 한 칸이 고양이 전사들이다. 글을 적으며 다시 확인해보니 <고양이 전사들> 영어 원서도 있다. (원서는 왜 샀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책을 사며 우리 집 거실에는 평생 텔레비전 대신 책장이 있었다. 난 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앞으로도 쭉 우리 집 거실에 텔레비전이 들어설 거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딱히 없다. 그랬던 우리 가족이 올해 초, 거실에 책장을 치우고 텔레비전을 들였다. 남들은 이제 텔레비전을 치우고 책장을 들이는데 말이다. 나는 우스겠소리로 “우리 집은 시대를 역행하네.”라고 말했다. 치워진 책장의 수만큼 버려지고 팔아버린 책들이 많다. 올해가 다 가고 있는 시점에서 조금 더 추억의 책들을 남겨놓을 걸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어리숙한 글씨체로 적은 수많은 날짜들과 아빠와 손 잡고 서점을 가던 토요일이 그립다.

이전 14화 꿈의 유실물 센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