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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 Oct 20. 2022

작가 호칭 알레르기


매년 여름과 겨울. 내가 대학에 붙은 해부터 나는 고3 친구들의 글을 봐주기 시작했다. 나와 같은 대학교에 입학하려는 고등학교 후배들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마감 직전, 선생님의 호출을 받아 3일 동안 알바로 고용됐다. 내가 가서 하는 일이 별 건 아니다. 자기소개서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낼 수 있도록 발상을 도와주거나 글의 전반적인 흐름을 봐주는 일이다. (대학을 위한 글들은 거의 소설이니까.)


마감 당일은 직장인들 사이에 끼어 서울로 향했다. 시간이 촉박해질 수록 하는 일이 살짝 달라진다. 예를 들면 글자 수를 줄이는 일. 혹은 쓰다 만 글을 뒤집어엎어 그럴듯하게 다시 써주는 일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친구는 600자를 쓰는 칸에 800자나 써놓았다. 학생이 최선을 다해서 글의 부피를 줄여놓는다. 최선을 다해서 줄인 글이 680자였고 나는 680자를 600자로 줄여야 했다. 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간 사이, 10분 만에 줄여서 카톡으로 보내줬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돌아와 그 글을 읽은 친구는 너무너무 좋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내가 최고라고 했다.

평소 글쓰기를 어려워하던 친구는 결국 제출 몇 시간 전까지 제대로 완성된 글이 없었다. 그 친구를 집중 마크했다. 옆에 앉아 글을 수정할 때마다 나에게 전송하라고 한 뒤, 수정된 글에 대해 반복적으로 피드백을 보냈다. 그럼에도 여전히 느리고 어려워해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한 파트도 있었다. 그럼 학생이 쓰려고 했던 방향에 맞게 그냥 내가 단숨에 후루룩 써버린다. 그리고 그 친구가 읽어보고 자신의 말투로 고쳤다. 이 짓을 몇 번 반복하니 글의 원래 주인인 학생이 나에게 고맙다고 말하면서 선생님 대박이라고 천재 같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반응에 나는


에이, 내가 무슨 작가도 아니고.


라는 말을 뱉어 버렸다.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오자마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또 최악이었다. 넌 아직 작가가 아니구나. 스스로를 작가 취급해주지 않는구나 여전히. 이 상황이 내 이야기가 아니라 작가를 지망하는 제삼자의 일인 것 마냥 씁쓸하고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또 현실의 나와 꿈꾸는 나를 분리시켜 버렸다.

내가 나에게서 빠져나와 혀를 끌끌 차고 있는 동안 나를 5년 동안 지켜보신 선생님께서 “글쟁이야 글쟁이.”라고 하셨다.


글쟁이??


듣기 나쁘지 않은 말이었다. 정말 모순적이게도 스스로 뱉은 말에 상처를 입었다가 누군가의 한 마디로 다시 치유되었다. 머쓱한 척하며 기분 좋게 웃어넘겼다. 의사 선생님도 경악한 알레르기 인간이지만 작가라는 말에까지 알레르기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이건 내 의지로 나아질 수 있는 것이고 해방될 방법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작가 호칭을 기피한 벌로 삼창을 외치겠다.


나는 작가다. 나는 창작자야. 나는 진짜 예술가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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