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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진 Oct 17. 2022

나는 선을 긋고 있어요.



내가 사는 아파트는 디귿 모양으로 구성되어있다. 앞 동과 마주 보고 있다는 뜻이다. ‘ㄷ'의 세로획에 해당하는 동에 살았으면 조금 덜 답답한 칩거생활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가로 획 두 개 중 위쪽에 산다. 창 밖의 풍경이라고는 기이하리만큼 거울 같은 맞은편 동이다.


해가 아파트 정수리 위에 있을 때쯤이면 작업을 하다 말고 어슬렁 거리며 거실로 나간다. 그리고는 한 손에 냉수를 들고 부엌 그림자에 숨어 거실 창 너머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본다. 보이는 건 마주 보는 층과 그 위아래를 포함한 3개의 창문들뿐이지만 말이다. 물 한 컵을 여유롭게 마시면서 ‘지금 이 시간에 집에서 이러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겠지.’라는 생각을 한다. 기분 좋은 자책. 그런 생각이 머리에 스쳐가는 순간, 정확히 반대편 창틀 위로 느슨하게 묶인 머리가 동동 지나간다. 그러면 방금 스쳐지나 간 생각을 굳이 끌고 와 정정한다. ‘이 시간에 이러고 있는 20대 초반인 사람은 나뿐이겠지.’라고. 건너편 동에 사는 아주머니께 내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아 더욱 부엌 안쪽으로 들어와 어두운 그림자 속에 숨는다.


야 네가 뭘 잘못했어? 왜 숨고 그래.라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 가족만 모르게 돌고 있을 수도 있는 소문을 조심해본다.


‘저 집 딸은 백수인가 봐. 맨날 집에만 있어. 머리는 노래 가지고.’


그럴리는 전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이런 소문이 돈다면 머리부터 염색해야지. 그리고 창문에 작업 중이라고 써붙일까 봐. 아니, 학교 과잠을 입고 다닐까?


이런 장난을 생각하면서 외롭게 작업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떠올렸다. 누구인지 모를 그들이 보고 싶었다. 그 예술가들 사이에 끼고 싶었다. 끌어 모으고 싶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예술가들이 이 시간에도 각자의 선을 긋고 있겠지. 그 다양한 선들이 언젠가 한 선으로 이어지겠지. 누군가 선을 세차게 그으면 또 누군가의 선에 닿아 이어질 것이고  진한 선을 가진 예술가는 약해지는 선을 찾아 힘을 실어주고. 그렇게 모두가 연결되는 세상을 꿈꿔본다. 예술가는 혼자일 수 없다. 혼자여서는 안된다. 벼랑 끝이라도 나아가 내가 이렇게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말은 고립된 예술가지만 계속해서 흔적을 남기고 알리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기록을 남긴다.


오늘도 나는 여기서 나만의 선을 치열하게 긋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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