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광의 세계」, 안희연
안희연 작가의『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서 각별히 내 마음에 박힌 시는 「역광의 세계」, 「구르는 돌」,「호두에게」이다. 이 세 가지 작품에서는 사람, 사물, 자연을 포함한 타자의 세계를 기꺼이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화자가 등장한다. 고독함 속에서도 타자를 향해 나아가는 예술가를 차례로 만나보자. 먼저 「역광의 세계」이다.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거기
한 사람은 살아 있을지도 모르다는 생각을 하면
한 페이지도 포기할 수 없어서
밤마다 책장을 펼쳐 버려진 행성으로 갔다
나에게 두개의 시간이 생긴 것이다
처음엔 몰래 훔쳐보기만 할 생각이었다
한 페이지에 죽음 하나
너는 정말 슬픈 사람이구나
언덕을 함께 오르는 마음으로
그러다 불탄 나무 아래서 깜빡 낮잠을 자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대화도 나누고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가을
새들의 울음소리를 이해하게 되고
급기야 큰 눈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고 말았다
한 그림자가 다가와
돌아가는 길을 일러주겠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빛이 너무 가까이 있는 밤이었다
「역광의 세계」 전문
책을 만드는 사람인 나는 처음 이 시를 접하자마자 순식간에 매료되었다. 가끔 실제로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고는 하기 때문이다. 사용하고 남은 종이들이 아까워 모으고 모아 책을 만든다. 그럼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책이 된다. 책이 완성되는 순간부터는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는 세계. 그렇게 나는 나의 창작물에 조금 더 깊이 빠져드는 경험을 한다. 작업을 하는 동안에는 거의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 안에서 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답답한 방 안보다 내가 그려낸 책 속의 세계가 아름답고 기특해서 자주 떠올리곤 한다. 작업이 끝나고 나면 자연스레 현실로 돌아오지만 가끔은 계속 그곳에 머무르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다.
화자 '나'는 버려진 페이지들을 주워 책을 만들었다. 그곳에 살아있을 수도 있는 누군가를 걱정하며 밤마다 그곳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멀리서 지켜보며 그들의 감정을 헤아리려고 했지만 결국 그들과 가까워져 버렸다. 그곳에서 낮잠도 자고, 누군가와 대화도 나누고, 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큰 눈 사태를 만나 책 속에 갇히게 되었다.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겠다는 이가 나타났지만 화자는 돌아가지 않기로 한다.
여기서 책은 '화자가 만들어 낸 상상의 세계'를 상징한다. 또한, 그 상상의 세계를 구성하는 버려진 페이지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들'을 의미한다. 즉, 화자는 밤마다 소외된 것들이 사는 상상의 세계로 향한다. 그러면서 그에게는 현실에서의 시간과 타자의 세계에서의 시간, 두 가지의 시간선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상상의 세계에서 그가 만나게 되는 '불탄 나무'와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 '가을', '새들'은 모두 어떤 사건으로 인한 슬픔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는 소극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그들에게 적극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불탄 나무 아래에 누워 나무가 불에 타기 전 모습을 떠올려보는 듯하고, 물웅덩이에 갇힌 사람과 소통을 하며, 시름시름 눈물을 떨구는 듯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의 슬픔과 새들이 우는 까닭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자 소외된 자들의 억눌러왔던 슬픔, 큰 눈사태가 그를 덮친다.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것을 보고 화자는 조금 더 그들과 함께 있기로 결정한다.
시의 마지막 행은 시의 제목과 연결된다. 우선 '세계'는 책 속, 버려진 행성, 상상의 세계를 의미한다. 역광의 정의는 '피사체 뒤에서 들어오는 빛'인데, 그렇다면 빛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상상의 세계에 존재하며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 바로 자신과 이질적인 타자, 소외된 존재들이 지닌 이야기가 아닐까 추측해 본다. 화자에게 길을 일러주겠다며 다가온 이에게도 누구에게도 관심받지 못한 무엇이 있을 것이다. 화자의 눈에는 그것이 환한 빛으로 보이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가 그 사람의 그림자를 만들어 냈을지도. 화자가 버려진 페이지들로 만든 그곳은 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너무 많은 빛이 있는 역광의 세계다.
굳이 버려진 것들로 책을 만들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안으로 향하며, 결국 그들과 함께 하는 '나'.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더라도 타자에 세계에 머물기로 하는 화자에게 결연한 태도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