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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유진 Aug 29. 2024

그림 그리는 돌맹이

「구르는 돌」, 안희연

    나의 여정은

    하나의 물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나는 어디에서 왔고 누구이며 어디로 가는가


    사람들은 나를 돌이라고 부릅니다

    어딘가에는 대하고 앉았노라면 얘기를 들려주는 돌도 있다지만

    나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돌에 가깝습니다

    절벽의 언어와 폭포의 언어

    들판의 언어와 심해의 언어

    온몸으로 부딪쳐가며 얻은 이야기들로 나를 이루고 싶어요

    그 끝이 거대한 침묵이라 해도


    중력이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나무나 새를 부러워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피조물은 견디기 위해 존재하는 것

    우울을 떨치려 고개를 젓는 새와

    그런 새를 떠나보낸 뒤 한참을 따라 흔들리는 나무를 보았습니다


    서서 잠드는 것은 누구나 똑같더군요

    모두가 제 몫의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렵습니다

    혹시 나는 파괴를 위해 태어났을까요?

    나의 전신이

    한 생명을 무겁게 짓누르던 바위였다면


    혹은 단단히 봉인해야 할 기억이어서

    눈과 귀가 지워진 채 깊이깊이 잠겨야 했던 거라면


    캄캄함은 나를 끝없이 돌려세우고

    환한 시간을 향해 걷게 합니다


    계속 가보는 것 외엔 다른 방도가 없지만

    언젠가는 대하고 앉았노라면 얘기를 들려주는 돌이 되고 싶어요

    그게 무엇이든 무엇도 아니든


                                                                                                    「구르는 돌」 전문



‘나는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돌에 가깝습니다’라는 문장에 나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는 세상에 그림을 통해 이야기하는 예술가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항상 이야기를 찾아다닌다. 매일 반복되는 삶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찾는 일은 굉장히 어렵다. 영감이라는 것은 오라고 싹싹 빌어도 영 오지 않는 것이기에 일상 속에서 이야기를 발견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주변을 계속 둘러보는 것,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조금의 시간을 들여 바라보는 것, 그리고 그것들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 이러한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이야기 사냥꾼 마냥 계속 먹잇감을 포착하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성찰하며 고뇌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는 걸까. 나한테 그런 권리가 있을까.' 그래서 이 시가 나를 끌어당긴 건가 싶다. 사실 나도 두려워하고 있다.

화자 '나'의 여정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됐다. 여정을 떠난 화자를 사람들은 돌이라고 부르고 화자 자신은 스스로를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한때 그는 자신과 달리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은 존재들, 나무와 새를 부러워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관찰하면서 결국 그들도 자신과 똑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화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가지고 두려워하지만 화자는 여정을 계속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며 앞으로 나아가기로 한다. 이야기를 찾아다니는 여정을 통해 결국에는 '얘기를 들려주는 돌'이 될 것을 화자는 소망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돌'이라는 소재가 반복된다. 여기서 돌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듯하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왜 ‘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얘기를 들려주는’ 행위와는 연결되지 않는 정적인 특성을 지닌 ‘돌’이라는 사물을 사용했을까? 아마 돌이 존재감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어디에 있어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평범한 존재인 돌. 여기서 화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가 나온다. 바로 예술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보단 타자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세계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 자연스럽게 섞이기 위해, 자신보다는 자신이 들려줄 이야기에 더 집중시키기 위해 스스로를 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시 전반에서 돌은 점층적으로 반복되는 양상을 띤다. 사람들은 단순히 '돌'이라고 부르지만,'이야기를 찾아 헤매는' 돌로, 마지막에는 '언젠가는 대하고 앉았노라면 얘기를 들려주는' 돌로. 점점 구체적인 양상을 띠며 반복되고 있다. 이를 통해 시 내부에서 리듬이 발생하며, 화자가 소망하는 구체적인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결국 화자는 얘기를 들려주는 돌이 되기 위해 이야기를 찾아 계속 '구르는 돌'이다. 


돌이 의미하는 바에서 더 나아가 보자. '캄캄함'은 화자를 끝없이 돌려세우는 것이자 '환한 시간'을 향해 걷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캄캄함은 앞 부분에 언급된 화자의 괴로움, 정체성에 대한 예술가의 고뇌를 의미하는 듯하다. 또한, 환한 시간은 화자가 걸어가는 방향으로써 화자가 찾아 헤매는 이야기, 즉 타자의 세계를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여정을 시작하게 하며 끝없이 자신을 돌려세우는 물음, 괴로움, 그리고 고뇌가 예술가가 타자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방 안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는 자격과 권리'에 대한 고민을 이 시의 화자도 하고 있다. 하지만 화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일에 초점을 맞추며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다짐한다. 그게 무엇이든 무엇도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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