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에게」, 안희연
부러웠어, 너의 껍질
깨뜨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진심이 있다는 거
나는 너무 무른 사람이라서
툭하면 주저앉기부터 하는데
너는 언제나 단호하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
한 손에 담길 만큼 작지
우주를 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너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흐르는 것일까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하나의 자세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결코 가볍지 않은 무게를 가졌다는 것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
미래는 새하얀 강아지처럼 꼬리 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새는 비를 걱정하며 내다놓은 양동이 속에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다는 걸
자꾸 잊어, 너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다는 거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거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나날이 쪼그라드는 고독들을
「호두에게」 전문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계속 시적 화자로 동화되었다. 나는 누가 후- 하고 불기만 해도 주저앉아 버릴 만큼 무른 사람이다. 그래서 언제나 단단하고 강한 사람들을 동경했다. 마술처럼 한순간에 진심과 껍질을 분리해 자신의 내면을 들키지 않는 단단한 사람, 스스로를 자유자재로 숨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진정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호두를 부러워했다. 그리고 ‘더는 분실물 센터 주변을 서성이지 않기', '밤이 밤이듯이 같은 문장을 사랑하기’라는 구절은 내가 쓴 듯 익숙했다. 나는 내가 너무 무른 이유가과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항상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되뇌었고 어떤 단어를 넣어도 말이 되는 문장, ‘내가 나이듯이’를 사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별 하나 없는 밤, 고요함 속에서 호두를 마주하고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에 내 얼굴이 있었다. 화자 ‘나’는 단단한 껍질을 가지고 있는 호두를 부러워했다. 껍질이 없는 화자는 쉽게 주저앉기부터 하지만 호두는 언제나 속을 내비치지 않았다. 호두를 손에 쥐고 있으면 비록 크기는 작을지라도 '나'에게 없는 것을 가진 호두가 우주처럼 거대하고 끝이 없는 신비로운 존재로 느껴졌다. 화자는 호두를 부러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호두에게 호기심과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껍질 속에서 호두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걸까. 그 순간, 호두는 화자에게 무수한 말들을 건네 온다. 끝내 호두에게도 캄캄한 시간을 견뎌온 과거와 그의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신이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먼저 화자의 어투에 주목해 보자. 이 작품은 호두에게 말하는 듯한 구어체로 쓰였다. 하지만, 5연의 두 번째 행만 ' -다'로 끝난다는 것에서 5연의 '너는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를 내게 건넨다'라는 행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게다가 호두가 화자에게 건넨 '무수한 말들이 적힌 백지'는 무수한 말들이 적혔음에도 불구하고 백지라며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5연을 중심으로 시를 다시 읽어보자. 5연 전까지는 '나'가 호두에 대한 부러움과 호기심의 정서가 주였다면, 5연 이후로 분위기가 전환되며 호두가 나에게 건네는 말을 중심으로 화자가 그동안 잊고 있던 사실에 대해 미안함 감정을 느끼게 된다. 또한, 무수한 말이 적혀 있지만 백지인 이유는 그 말들을 적기까지 호두가 '결코 가볍지 않은' 시간들을 보내왔으며 그 말들은 긴 시간 동안 호두가 깨달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비밀스럽고도 중요한 깨달음을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가오는 화자에게 전한다.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는 백지의 모습으로.
다음으로 8연의 첫 문장 '자꾸 잊어'는 중의적인 행갈이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첫 번째, 미래가 설거지통에 산처럼 쌓인 그릇들 속에 있는 것처럼 미래가 다가오는 방식을 자꾸 잊는다는 의미. 두 번째, 호두도 누군가의 푸른 열매였고 세상 그 어떤 눈도 그냥 캄캄해지는 법은 없다는 것을 자꾸 잊는다는 의미. 호두 덕분에 미래가 다가오는 방식을 깨달은 화자는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호두에 대해 잊고 있던 것들도 함께 떠오른다.
중요한 것들을 자꾸만 잊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의 정서가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라는 행은 4연에서 호두에 대해 호기심을 가졌을 때와 마지막 연에서 반복된다. 이 두 번의 반복은 어둠 속에서 어떤 위로도 구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호두의 이미지와 문도 창도 없는 방 안에서 고독을 느끼고 있는 화자의 모습이 겹쳐 보이게 한다. 또한, 마지막 행에서 '고독들'이라는 복수형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화자와 호두가 동기화되면서 사실 화자는 호두를 부러워하고 있지만 누구보다 호두의 마음을 잘 헤아릴 수 있는 존재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 호두 '너'의 마음을 잘 알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제목을 '호두에게'로 정한 것을 아닐까. 이제는 화자가 호두에게 백지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