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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지 Apr 14. 2023

감정받이

혹은 감정의 쓰레기통


좀 유난스러운 구석이 있는 아들을 키운다.

전화를 엄청 해대는 초등학생이 아들이면

하루에 20통은 기본으로 받아햐 한다.


기분 좋은 전화면 그래도 좋으련만,

대개는 게임 시간제한을 늘려달라는 전화,

아니면

학원 숙제가 덜 끝났는데

힘드니까 그냥 집에 가면 안 되냐는 전화,

아니면

동생이 어쨌고 저쨌고 그래서

너무 짜증 나 죽겠다는 전화

아니면

놀다가 짐볼에서 넘어졌는데

팔뒤꿈치가 부러진 거 같다는 전화.


나는 직장을 잘 만나

B2B로 십여 년 일하면서

남의 감정을 떠안아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생 민원인은

집에 앉아서

멀리 광화문에 앉아있는 내 귀에

오만 짜증을 죽어라고 내뱉는다.


아들 이름이 전화기에 뜨면

정말 거절을 누르고 싶은데

애미된 마음에 자석처럼 어쩔 수 없이

통화버튼을 누르면

귀라도 좀 멀리 떼고 듣는 시늉만 해야지

다짐을 하지만 영락없이

민원인의 민원이 내 고막을 파고들고

나도 모르게 짜증을 듣다 보면

내 안에서도 짜증이 차오른다


그래서 나보고 지금 어쩌라고


이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그러나 지 속상하다는 말이니


그래 너 속상했겠다


이 멘트를 기계처럼 읊는다.


듣는 민원인도 내가 감흥이나 진심 없이

그래 너가 속상했겠구나

말하는 걸 듣고 딱히 위로받진 못하는 거 같다.


퇴근시간 넘어서

보고서를 쓰고 있는 나에게

짐볼 위에서 뛰다가

팔꿈치가 부러진 거 같다고

우는소리 하는 민원인 전화를 받으면


무언가 가슴에서 탁 하고

심지가 끊어지는 것 같은 마음이 들면서


위로 답변을 낼 수가 없었다.


그러게 너 엄마한테 말도 없이 어디 가서 놀다가 그러는 거야!!!


호통 한번치고

아직 시작도 안 한 내 주말이 소멸되어 버릴

위기감을 느끼며 얼마큼 아픈 건지 이것저것 물어본다.


아무래도 자기 팔꿈치가 금 간 것 같다는 애 말에

응급실에 가야 되나

남편에게 전화를 해보면


친구들과 저녁 먹는 자유시간이

막 시작했는데 지금 바로 종료될까

두려움에 떠는 남편이

괜찮을 것 같다고 급 마무리하는 말에

맛있게 먹어~

비꼬듯이 말해도

알아듣지 못하고 알았다며 끊는다.

 

나는 내 열한 살 아들의

오롯한 감정의 쓰레기통이다.


그리고 나는 자꾸 입이 마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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