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AG, 살기로 결심하다

진정한 애도 3_이젠 남은 아빠에게 엄마에게 해 줄 것까지 다 하기

  엄마가 그토록 내가 교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도 엄마의 열정 가득한 집착이자 어쩌면 나를 통해서, 못다 이룬 엄마의 꿈을 대신 이루고자 하는 대리 만족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못다한 자기 실현이나 꿈의 한으로 인해 끝까지 딸이 임용후보자 선정 시험을 포기하지 않기를 엄마는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일까.

  바로 교사가 되지는 못했지만 일은 잘 풀리기 시작하였다.


  돌아가기 전까지 엄마가 그토록 기도하고 바라고 소망하고 원하던 바대로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부터 정말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하는 길이 열리고 심지어 지금도 약 95일 정도 쉬고 나서 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과외가 끊이지 않고 2017년도 8월 14일부터 2019년도 1월 5일까지 일산에 있는 국제 학교에서 국어와 한국사 교사도 하였다.

  지금은 대안학교 내에 있는 공립학교 위탁 학생들을 가르치는 위탁 학교에서 중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감사하게도 맡겨 주셔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감당하고 있다.


  엄마가 살아 있는 날들에 그토록 보고 싶어 하고 오랜 시간 동안 기도해 온 열매들을 엄마는 하늘 나라에서 그 열매들을 보고 계신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올려놓는 진실의 식탁 내지는 상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한 성경 말씀처럼 나도 믿지 않은 나를 위해 기도한 엄마는 그 믿음대로 이루어진 현실을 하늘 나에서 내려다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엄마가 이세상에 사는 동안 나에게 보여주지 못한 인자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것만 같아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 보며 그런 엄마의 얼굴을 가끔은 감은 눈으로 들여다 보곤 한다.




  아무튼지간에.

  엄마가 하늘로 돌아간 후 엄마와의 이별을 준비하던 날들을 다시 더듬어 보면,참 어떻게 보면 철이 없었다. 엄마가 돌아갔는데도 나를 위로하기 위해 장례식장에 문상 온 친구들을 오히려 내가 역으로 위로하는 기상천외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나는 그해 초 겨울에 엄마로부터 충만한 사랑을 주고 받고 엄마와 모든 것을 화해하고 풀고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서 받은 후였기에 아무런 후회도 아무런 아쉬움도 엄마와의 관계에서는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었던 힘은 이미 그해가 시작되는 겨울, 엄마와 30년 동안 맺힌 집착과 애착 사이 그 어디메쯤의 한스러움이나 응어리를 서로 함께 풀었기 때문인 것이다.


  엄마의 나머지 두 아들은 엄마와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나로서는 한이 없다. 엄마와는 이제 말이다.

  

  엄마에게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잘 하겠다고 빈 적도 두 번 정도는 있는 큰 사고도 치른 불효녀인 나이지만.

  그런 자식이어서일까.


  엄마랑 가장 많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신 나는 돌아보면 행복한 아이인 것이다.


  때로 애착을 다 못한 엄마의 집착이 과해 오빠랑 내가 같이 외출하여 같은 공적인 모임에 갔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 '왜 너는 나돌아 다니기만을 그렇게 좋아 하느냐'고 오빠에게는 절대 하지 않는 잔소리를 할 때는 나도 참 화도 많이 나고 어이도 상실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정말 그런 잔소리를 할 때는 엄마가 정말 눈코 뜰 새없이 바쁘거나 감기몸살 등으로 무지하게 아픈 때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럴 땐 나도 센스 있게 집에 있어주고 엄마를 돌봐 주고 엄마를 돌아보아야 했는데 역시나 나도 자연스러운 엄마와의 애착이 없는 관계로, 그런 애정 어린 센스를 발휘하지 못한, 센스가 부족한 단 하나의 딸이었던 것을 이제서야 하늘에 있는 엄마에게 솔직하게 미안하다고 사부작 살짜쿵 고백해 본다. 지금이라도 서로 다른 시공간이지만 우리의 영혼이 함께 존재하고 있으며 서로 소통하는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증오와 애정이 혼돈하는 카오스의 관계인 엄마와 나의 관계.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애정해 주고 엄마의 꿈의 대리 만족을 위해 끝까지 임용후보자 선정 시험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 그런 과정 속에서도 엄마와 함께 보낸 2010년 겨울의 2-3달의 매일 매일의 기억 그 따스한 시공간을 나는 늘 잊을 수가 없어서 마음이 서늘해지면 날이면 내 마음의 서랍에서 꺼내서 그 공기와  그 온기며 훈기며 그때의 봉실봉실 하얀 엄마 뺨과 엄마의 보이지 않지만 늘 나를 향해 젖을 먹이려고 늘 열려 있는 것만 같은, 그 어떤 엄마들보다도 엄청나게 큰 가슴을 지닌 엄마의 품과 누룽지 끓여 먹고 라면 끓여 상추 쌈싸 먹고 점심 먹고 나면 늘 


  "꽃네야, 커피 물 올려라."

  하면

  "예~~~이~!"

  하며

  '아' 하면 서로 '아' 하면서 믹스 커피를 타 마시며 홀짝거리던 따듯한 엄마의 "얼음 땡"이 가득 충만하던 그 겨울 따스한 햇볕이 가득한 우리집 거실과 안방을 잊을 수가 없다.


  매일 같이 기도하다가 울고 불고 난리가 난 오전 한나절.

  엄마가 나에게 30년 동안 나를 잘못 키운 것이 있다면 엄마가 미안하다고

  처음으로 나에게 한 미안하다는 말.


  그리고 나서 엄마가 돌아가기 전.

  엄마가 자꾸 잠을 못 자서 기운이 없어 반찬을 못 할 때.

   

  저녁 식사 후 부엌에서 설거지하는 나의 뒤통수에다 대고, 안방에 앉은바라기를 한 엄마가 말하였다.


  "이제 엄마가 반찬을 못해 주어서 미안해서 어떡하지."


  그때 또 여지없이 역정을 내고 말았다. 나는.  

  지금 돌이켜 보면 바보 같이 말이다.

  잠 잘 자고 건강해져서 또 해줄 수 있다고 왜 그런 말을 그렇게 하느냐고 무턱대고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항상 누가 말할 때 잘 들어주라고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이 스스로에게 닥치면 화부터 나는 것이 인지상정인가.


  엄마가 반찬을 못해 주어 미안하다는 말을 했을 때 정말 순간 화가 치밀어 소리를 지른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 말이 사실이 되고 만 것이다.


  엄마는 그렇게 어린 나를 0-7살까지 엄마 무릎 학교라고 해서 교육학으로 치면 엄마 무릎에 앉히고 눕혀서 젖 먹여야 했던 나에게 그러지를 못한 죄책감, 책임감과 그 못다한 애정을 그이후 시간에라도 엄마 살아 생전에 다해 주려고 살아있는 동안 내내 그걸 다 빚 갚듯이 해 주느라 서로 관계에서 많은 역효과를 맛보았다. 그건 역시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우리 엄마는 정말 자신이 갈 것을 알았는지 외할머니에 대해서도 외할머니 동네에 같이 사시고 엄마와도 막역하게 지내는 집사님에게 외할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정중하게 전화를 하고는 엄마는 홀연히 떠났다. 원래 본향인 하늘 나라로.


  그런데 한동안 엄마의 죽음에 많은 의문과 많은 자책을 가진 우리 가족은 서로 위로하기에 바빴다.

  심지어 나는 엄마의 죽음에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장례 마치고 돌아와서 바로 처음 맞는 금요일에 교회에서 가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에게 떼굴떼굴 구르면서 따지고 들었다.


  "우리 엄마 그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뭐 하셨어요!!!"

  라고 소리를 소리를 질러댔다.


  그런데 나는 그의 단 한 마디의 음성 앞에 허망하게 모든 대거리의 투지를 꺾고 깨갱 하였다. 


  엄마의 죽음 이후 아빠가 너무 괴로워하고 힘들어 하였기에 엄마와의 갑작스러운 이별 앞에 엄마에 대해 더욱 깊이 애도할 시간을 못 가진 것도 사실이다.


  아빠가 너무 슬퍼해서 나는 혼자 두세 달만 슬퍼하고 시험 보고 나서 조금 쉬다가 11-12월 동안은 논술 전문학원에 단기 취직해서 수능 논술 첨삭해 주느라 정신없이 살았다. 그래서 엄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금세 가시었다. 그리고 나서 바로 1월부터는 원래 일하던 학원에서 다시 부르셔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그 이후 여러 문제는 그때 엄마와의 이별 앞에 제대로 진짜 더 깊은 애도를 못한 것에서 발생된 것 것 같다.


  아빠와 오빠, 동생과 상관없이 나는 둘도 없는, 단 하나 뿐인 엄마를 상실한, 나의 감정을 잘 살피고 잘 애도를 했어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당시만 해도 그런 개념이나 컨셉 자체에 대한 의식도 가질 수 없었다. 그런 심리학적인 정신적인 지식도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충분히 그때 더 깊이 진지하게 애도를 하지 못한 것, 안한 것이 나의 정신 및 육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사실은 잘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오랜 시간 엉클어진 것을 다 풀고 가서 참 다행이다.

  엄마와 사이가 안 좋았던 것만 같아 좋은 사이와 안 좋은 사이 그 큰 간극 속에서 늘 걱정하고 노심초사하면서 살아온 나와 엄마.


  그렇기에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 난 정말 해방둥이가 되었다.


  나를 집착하던 사람이 사라지고.

  엄마가 돌아가고 나서 아빠는 아빠이자 엄마인 심지어 '엄빠'가 되고 말았다. 거기에 이제 나와는 친구처럼 막역한 아빠이다.


  아들들은 늘 무뚝뚝하여 아빠와 말을 잘 안하니 아빠는 나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한국 정치부터 세계 정치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 가지에 대하여 대화를 많이 한다.


  그런데 역시나 집착하던 분이 돌아가시고 나니 나는 개망나니가 되기도 하였다. 그전에도 돈 관리가 안 되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더 안되고 그래서 쇼핑 중독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두고 두고 살펴야 할 나의 현재진행형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와 오랜 시간을 보낸 엄마는 사실 1인 5-6역을 하면서 살다가 56살에 생을 마치셨다.


  그토록 힘들게 온 몸이 부서져라 일을 많이 했던 엄마.

  집안일 뿐만 아니라, 집에서 아줌마들 머리해 주는 부업도 하시고 [원래 미용실도 한, 한때 동네에서 머리 잘한다고 소문나고 헤어컷 잘한다고 손맛이 좋다고 소문난 미용실 CEO이셨다. 동생 낳고 집에 들어 앉으셔서 야매 미용실 미용사가 되시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이것마저도 주위 시기 질투 및 현실적인 제한과 한계로 인해 하기 힘든 상황으로 가고 만다.]




  이제 이 글을 시작으로 엄마와 나의 사이에 왜 어떤 일이 있었기에 나는 또 화병이 생길 조짐을 계속 키워온 것인지 그 이야기도 앞으로 이 매거진에서 계속 이어가고자 한다.


  모든 화병, 모든 우울증은 어떤 사소한 하나에서 기인할 수도 있지만 태아일 때부터 어떻게 부모님에게 받아들여지고 수용받고 사랑과 환영을 받았는지 아닌지로부터 시작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이 엄마에 대한 애도의 문제부터 시작하여 나는 어떻게 태어났고 엄마 아빠는 나를 어떻게 대해 왔는지부터 살피면서 화병, 다시 말하면 급성 우울증의 기저가 되는 엄마 뱃속의 잉태로부터 출생, 그리고 양육, 그리고 필자를 둘러싼 다양한 환경과 필자 자신의 기질과 성격 속에서 필자가 어떻게 화병이 생길 수밖에 없는 기질, 성격, 환경[가족, 가정 형편] 및 세상과의 상호 관계 속에 있었는지 지금은 어떻게 극복 내지는 화병과 친구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지를 계속적으로 밝혀 나가고자 한다.

  

  또 엄마가 돌아가신 후 더욱 심각하게 전개된 쇼핑 중독은 어떻게 발전되고 심화되어 필자를 잠식하고 번쩍 눈이 뜨이게 하는 각성을 하게 하였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도록 할 것이다. 

 

  아무쪼록 이 작은 자의 연약한 고백이 뭇 많은 우울증러들과 화병러, 공황장애러들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살아갈 만한 것이며 축복이라는 사실을 전하며 우리 절대 죽지 말고 끝까지 살아가자는 살아내 보자는 이야기를 함께 북돋우며 나누고 싶다.


  더이상 우리 엄마나 내 동생 같은 죽음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우리집에도 그리고 나도 아빠도 우리 오빠도 말이다.


  나의 생명을 지키고 끝까지 지탱하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 않으면서 말이다. 



바람 부는 2021년 3월 2일 화요일.
오후에 쉬려고 한 건데
배가 불러서 배를 꺼 뜨리러 배달의 민족, 쿠팡 이츠 배달 운행을 나갔다가
피곤함이 괜시리 더한 듯하다.

코로나도 2년차라
전국 학교가 정상적으로 개학하였다.
전국 유치원도 정상적으로 개원하였다.

개학과 연관되어서가 아니라
괜시리
"바람이 머무는 날"
을 검색하여 듣는다.


원래는 다른 성가곡을 들으려고 하였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선회.


머리에 불현듯.
이 곡이 스치듯 떠오른다.

어머니를 향한, 진짜 진정한 애도를
이제서야 시작하나 보다.

세상 모든 어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어머니는
인생의 모든 순간을 하나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시고
최선을 다해 불태우고 가셨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1인 5-6역을 하셨으니
그래서 너무 일찍 힘을 다 쏟으셔서
이제는 하늘 나라에서 참된 안식과 평화 속에
쉬고 계시리라 생각하니
애도 속에도 참 잘 되었다, 다행이라 여긴다.

소프라노 조수미 선생님의 오롯한 목소리를 타고
잠시 어머니의 생애를 고요히 회고하며
애도의 묵념을 바람결에 띄운다.

대화의 희열에 출연한 조수미 선생님이

‘어머니’를 위한 노래라고 밝히신 

"바람이 머무는 날", "어머니의 마음"을 듣고 있노라면 

1인 5-6역을 하며 바쁘게 살아 내셔서 

모든 힘을 일찍 다 소진한 소같은 삶을 산 엄마가 떠오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mjO8rRV_hWM


바람이 머무는 날


노래 조수미
작사 권태희
작곡 Michiru Ohshima
편곡 김애라

바람이 머무는 날엔
엄마 목소리 귀에 울려
헤어져 있어도, 시간이 흘러도
어제처럼 한결같이

어둠이 깊어질 때면
엄마 얼굴을 그려보네
거울 앞에 서서 미소지(으)면
바라보는 모습
어쩜 이리 닮았는지

함께 부르던 노래 축복되고
같이 걸었던 그 길
선물 같은 추억되었네
바람 속에 들리는
그대 웃음소리 그리워

어둠이 깊어질 때면
엄마 얼굴을 그려보네
거울 앞에 서서 미소지(으)면
바라보는 모습
어쩜 이리 닮았는지

함께 부르던 노래 축복되고
같이 걸었던 그 길
선물 같은 추억되었네
바람 속에 들리는
그대 웃음소리 그리워

바람이 머무는 날엔
엄마 목소리 귀에 울려
헤어져 있어도, 시간이 흘러도
어제처럼 한결같이

어둠이 깊어질 때면
엄마 얼굴을 그려보네
거울 앞에 서서 미소지(으)면
바라보는 모습
어쩜 이리 닮았는지

함께 부르던 노래 축복되고
같이 걸었던 그 길
선물 같은 추억되었네
바람 속에 들리는
그대 웃음소리 그리워

Kazabue 바람이 머무는 날 - 조수미




*출처를 밝힌 인용 문구와 사진을 제외한 작가 BAG의 모든 문구, 문장, 글, 사진, 동영상의 저작권은 작가 BAG에게 있습니다. 작가의 허락 없는 무단 도용시 법적 조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전 05화 BAG, 살기로 결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