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더 이상 소사는 없어.

by 박하

너를 떠올리면 나는 항상 긴 편지를 쓰는 기분이 든다. 사실 편지를 단 한번도 제대로 써 본 적 없었는데도. 우리는 기껏해야 세상을 위해 힘 썼던 사람들. 소방관, 간호사, 선생님같은 무리들에게 무작위로 응원하는 카드를 썼지. 학교에서 그런 걸 시켰었으니까. 그럼 내가 알지 못하는 멋진 일들을 그들이 해결한다고 생각하며 뻔한 소리를 가득 채웠었어. 당신들의 노고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마저 스스럼없이 썼지. 모르는 건 모르니까 믿을 수 밖에 없어. 응원하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모르는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 차라리 알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은 사람이 하나 둘, 떠오르는 건 그래서일거야.

우리가 작은 상자에 살고 있었을 때는 늘 질서의 회복을 꿈꾸고 있었지. 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웠는데 몇몇 사람이 날 씩씩하다, 용기 있다 말하는 걸 보고서 거짓말은 작작 하라며 쏘아붙이고 싶기도 했어. 더없이 삐딱하고 터무니없을만큼 연약했으니까. 강한 무기와 동료가 있는 만화 속 세상은 어쩜 저리 듬직한가, 그 환상에 매료되어 지금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다투거나 문제가 생기거나 하는 일들 역시 환상 속에서도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었지만 금세 잊었던 것처럼. 너도 아마 잘 알고 있을거야. 과거에 용기를 불어넣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래, 넌 말하지 않아도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니까.

네 말을 듣고 있노라면 난 자주 침묵했지. 아주 먼 저편을 생각하는 사이에 상실은 덫이 되어서는 안 되고 가난을 벌주면 안 된다는 해석을 할 수 있게도 됐고. 개인의 긍지나 존엄을 갉아먹는 것이 교육은 아닐 거라고도. 해야할 것을 알지는 못했더라도 하지 말아야 할 짓을 구분짓는 힘이 자랐다. 넌 어떠니. 말하는 것으로도 세상을 바꿀 힘이 생겼니.


이 세상에는 집에 가기 싫어하는 개도 있다고 한다. 보통 마당에 묶인 개가 집 밖을 나가고 싶어하는지, 그럼 집을 싫어하는지 알 생각조차 하지 않아. 집을 지킨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의 착각일지도 모르는거야. 그래서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낯선 사람을 보면 ‘야! 너 정말 부럽다. 나쁜 자식.’ 그런 맘으로 컹컹 짖을 수도 있는거야. 어느 집 누렁이가 목줄이 풀려 달아났다는 사실에는 집을 지키는 게 누렁이의 소임이라는 전제가 깔려있어. 자신에게 돌아온 자유로 인해, 돌아오지 않게 되어버린. 목줄이 풀린 개는 그 무엇도 지키지 않는다. 지켰던 적이 있을 수도 있다. 집이 있었더라면.

자유보다도 불안을 먼저 느끼는 건 인간 뿐이야. 누렁이는 길에서 마주친 장소 곳곳마다 영역을 표시할테고 안전한 곳을 찾아 잠에 들겠지. 때론 먹을 것이 없어 배를 곪을 수도 있지. 희멀건한 자유에는 그만한 행복이 있을까. 그것이 행복이고 구속은 불행일 뿐이라 말하면 인간은 바보나 다름없어. 다만 그렇게 살기로 정했다면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감내하는 것, 그 삶이 고되고 후회가 밀려올 때 비어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한들 매정히 내칠 주인이 있을까. 쉰 소리를 뱉으면서도 밥을 챙겨줄테고 담요를 깔아주고. 그리고. 목줄을 다시 채우겠지. 그렇다면 불행과 행복, 절망과 기쁨은 어디에도 없는거다. 좋게 보면 한없이 좋을, 나쁘게 보면 끝없이 가라앉을 일들. 모두 묘한 일이 맞는거지. 인생은 너무나 묘해서 실수를 경험이라고 성공을 행운이라고 일컫기도 하지. 온갖 것들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세계로 떠나는데, 집 나간 개의 마음 따위 알 게 뭐야.


어떤 처지를 공감하지 못한 채 뱉는 말은 이렇듯 무책임 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짐작하는 것으로 그치는 공감미수니까. 누군가를 안다는 말로 교만을 뿌리고 다니는 인간이 현저하게 낮은 사회성을 지닌 사람을 욕할 수 있나. 자기가 내심 불안하더라도 ‘내가 불안하니 너도 이 상황을 불안해 하도록 해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처참한 말로를 맞게 되는 걸 두고 보지 않으려고 싹부터 잘라내는 것 같기도 해. 사람이 많은 서울에 갔더라면, 아니면 네가 여기 그대로 머물렀다면 나는 나와 비슷한 인간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아니 너는 나와 동류가 아니지.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해야겠네. 이런 종류의 인간도 버젓이 살아 있다는 걸 인정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었을까? 알지, 규격에 맞지 않는 상자에 오래 살면 괴팍해진다는 걸. 나는 너를 보며 깨달았어.

만화 이야기를 더 하자면, 끝끝내 사랑을 길러내지 못해 고꾸라지는 악당들을 많이 봤었지. 그들 나름의 이유와 사정을 설명해주는 작품도 있고 아닌 채 얼기설기 마무리 짓는 이야기도 있었어. 순탄한 듯 흘러가는 이야기들이 거기 집중하지 않았던 건 정의와 질서만 가르치면 목표가 충족됐기 때문이었을거야. 떠먹여 주는대로 납득하지 않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인간이 녹록치 않다는 점이겠지. 모든 사람에게 사정이 있겠거니 하는 마음을 싸그리 무시한 채 옳고 바른 형태로 돌진하니까. 집착이나 광기에 가까운 일일지도 몰라. 콰쾅- 하며 터져서 별처럼 날아가는 것 말고, 조금 더 자세하게 죄의 값을 셈할 줄 알았더라면 작은 일에도 공포로 머저리가 되거나 큰 일을 얕잡아 보는 멍청이가 되진 않았겠지.

상자 안에서 끊임없이 생겨난 화두들에 대하여 가끔 생각해보곤 해. 날 선 사회에 너무 빨리 노출되어버린 인간이 유약한 지점을 공격당하며 배워야만 한다면 말이야. 아무나 붙잡고 도와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나는 세상 가장 모퉁이에 산 게 아니었을까. 그 낡은 집처럼.


너는 내 일그러진 태도를 용납하지 않겠지.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평화를 들어 싸우고 때때로 개인을 사회라 말하니까. 사람의 본성이 그렇다면 회피하는 게 편할거야. 충돌하는 이익이 양 쪽에 순수하게 남지는 않더라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기도 하지만. 일상에 침투한 혼란이 인생이라면 고통은 가중치가 될까. 어떤 책은 그걸 다정한 고난이라고도 부르더라. 삶을 통틀어 혼란을 훈련하게끔 만드는 것이라며. 굴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을 줘야 할 판에 줄 지어선 다음 시련을 상대할 힘이 없어. 끊임없이 뇌에서 행복을 굴리는 주인공이야말로 인류의 희망인 것처럼 트로피를 세울거야.

이 쯤 되니 풍부한 경험으로도 감출 수 없는 고난들과 함께 결국 운명에 다다르게 된 듯 하지만 그렇게 쉽사리 도망치게 둘 생각은 없어. 무엇보다 난 누굴 가르치려는 게 아니야. 저마다 받아들이는 게 다를테니 말이야. 모두 같은 도덕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면 분쟁따위로 세상이 시끄러워질리 없겠지.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어. 내가 미처 배우지 못한 종의 특징일수도 있고.


신은 설명하기가 난감하다고 생각해. 왜 믿는걸까. 거룩함을 가졌다는 자들에게 물어봐도 ‘그는 모든 걸 알고 계시다’ 정도의 톤으로 말하면 끄덕끄덕 수긍하게 되는 거의 유일한 것. 그래서 믿기가 어려워. 다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 좋을대로 응답한다는 사실이 추해. 너는 종교에 심취한 사람을 건드리지 말라고 했잖아. 모든 걸 그렇게 해결하는 게 좋은 거라고. 본 적도 없는, 아무거나 주워담아서 기분따라 응답하는 신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어째서 신에게만 관대한건가 따지지도 않아서. 옹졸하지. 나도 옹졸해. 질투할 게 없어서 그런 걸 질투하고 있는 꼴이.

난 아직까지는 설명되는 것만을 믿고 싶은가봐. 그래야 맞서는 삶과 맞설 수 없는 삶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될 것 같거든. 너는 어떤 편이니. 맞서는 편이야? 아니면 맞서지 않는 편이야? 나는 우리가 살던 세계가 너무 좁아서, 자기 영역이 보장되지 않아서 맞서지 않으면 떨어져 나갈 수 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 여기서 벗어날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했어. 너의 사다리를 부러워한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줄게. 이제 더 이상 소사는 없어.

자고 일어났을 때 모든 게 끝나있으면 좋겠어. 그럼 이만 줄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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