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허드렛 일을 하고 있는 양반이 네 아버지다.’
소사를 아는가? 아버지는 다리를 저는 소사였다. 그래서 적당히 모른 체 하고 달아날 수 있는 일들로부터 벗어나는 데 오래 걸렸다. 기억을 증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러나 어린이는 가능한 모든 걸 기억할 수 있다. 더불어 감정을 각색하는 방법은 서툴다. 누구나 간과하는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두렵고,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당신보다 선명하고 오래 남을 기억을 새기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고 이 씨 혹은 소사라고 불렀다. 난 할머니 집에 살았고 소사는 학교에 살아서 학교에 입학하는 날 처음으로 소사를 봤고, 아버지인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봤다. 소사는 교문에서 명패를 갈고 있었다.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말이다.
어른들은 학교의 각종 잡일을 하는 사람을 소사라고 불렀다. 더 나쁘게 말하면 머슴, 좋게 말하면 경비원과 비슷한 그런 지위였다. 누군가를 일컫는 단어가 있다면, 어른들이 부르는대로 아이들도 따라 부른다. 당최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른다. 나는 소사가 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엔 전망있는 직업도 멸시받는 직업도 관심이 없었다. 현재를 불안해하는 사람에게 미래를 묻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느 누구는 소사라는 단어를 듣곤 그게 일본어의 잔재라고도 했다. 그보다 더 나쁘게 말을 보탤 것도 더 좋게 포장할 것도 없는 일을 하고 있어서 소사를 아는 모든 사람은 그저 소사라고 불렀다. 훈화를 하던 교장이 초등학교로 바뀐 사실을 잊고 익숙하게 국민학교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따로 부를만한 명칭이 마땅치 않은 게 변명이라면 변명이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안다고 하면 다행이고, 모른다면 호기심을 좀 더 붙들고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한다. 난 끝내 소사를 아버지로 부른 적이 없었으니까.
저 사람이 너의 아버지요 라고 누군가 말해주면 마냥 기쁠 줄 알았다. 동급생 중에는 자기 아버지가 대단한 사업을 하러 멀리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는 이야기를 하거나 서울에서 크게 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었으니까. 돈을 잔뜩 벌어올거라고 기대하면서. 나도 은연 중에 그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어디선가 번듯한 사내가 나타나 그간 고생많았다며 나를 데리고 갈 상상을 하며 말이다. 소사는 폭삭 무너진 환상이었다. ‘저 허드렛 일을 하고 있는 양반이 네 아버지다.’ 난 풍요롭진 않더라도 번듯한 삶을, 번듯한 삶이 아니더라도 구차하지 않은 삶을 원하고 있었던거다. 새빨갛게 된 볼을 가진 소사가 촌스러워 보인 것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하여 나는 섣불리 아버지의 존재가 내게 불행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다. 소사라는 직업 자체를 불행이라 생각하는걸까? 무엇보다 불행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인간에겐 방어기제라는 게 있다. 불행은 인정하지 않는 쪽이 속 편하고 자신을 지키기에 수월하다. 그럼에도 모든 걸 막아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스스로가 인간임을 자각하지만, 내 경우엔 평생 풀리지 않을 독을 여러벌 겹쳐 입은 느낌이었다. 혹시 아버지가 다리를 전다는 게 불행이라고 여겼던걸까. 아버지를 생각하면 나는 늘 덜 익은 라면을 먹는 기분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완벽까지 기대하진 않는데 허기를 참을 수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어정쩡한 것을 밀어넣는 느낌. 아버지란, 더 크게 보면 부모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여지껏 본 적도 없는 아저씨를 순식간에 아버지라고 부르기란 쉽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강요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난 쉽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소사를 소사라고 불렀다. 내가 겪은 고난 혹은 아버지라는 게 존재 그 자체로 직접 열어서 확인할 때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였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그것 말고도 내게 이미 어려운 문제가 많이 닥쳐 있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도 익숙해지면 뭐랄까, 쉬워질 수 있나? 영화든 책이든 이 세상 모든 이야기들이 쉽지 않은 일을 끝끝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일컫는데.
유명한 책들을 읽어보면 보통, 주인공이 아주 특별하고 특수한 불행을 겪으며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곤 한다. 난해한 병명이나 기구한 운명을 흐르는대로 따라가다가 어느날 짠, 극복하고 눈물을 흘린다. 긍정의 에너지로 가득한 희망찬 미래! 그리고 앞으로는 뭐든지 잘 풀릴 것만 같다. 익숙해진 것을 벗어나기가 그렇게 쉽다면 나는 내게 스민 독소를 단숨에 벗어던질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어렵다. 그들은 주인공이다. 세상의 밝은 조명이 전부 내 쪽으로 향해 있다고 상상하면 나는 ‘어쩌지, 더 어두운 구석으로 도망쳐버릴 것 같아.’
주인공들은 행복과 불행을 쉽사리 판단한다. 그런 주인공들보다 내가 훨씬 능숙한 자세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있는데 그건 행복이냐 불행이냐를 단숨에 가르기보다 불행인가, 불행이 아닌가 생각하는 태도다. 낙관은 지친다. 비관은, 비관은 지치지 않는다.
사람에겐 제각기 평생토록 영영 쉬워지지 않는 일도 있다. 달아나는 건 쉬운 쪽이다. 쉽게 보이는 걸 쉽다고 착각한다. 어려운 길을 걸어 난관을 해결하는 장면이 괜스레 나오면, 주인공을 시련에 빠트려야만 성장할 수 있다는 낡은 관념이라 치부했다. ‘누군가 해 주겠지’ 주인공이 마음 편히 하하호호 마을 사람들과 잘 어울리며 여생을 마쳤답니다. 하는 이야기는 이 세상에 없는 것처럼. 그러나 나는 현실의 사람들이 누구나 편한 길을 원한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덜한 낌새만 보이면 고민없이 곧장 그 길을 걷기로 마음먹는다. 잘 될 수도 있고, 잘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런 선택을 한다. 어려워보이는 길이 가장 빠를 수도 있다는 말은 자위나 자학에 가깝다. 그게 얼토당토 않은 소리라는 걸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고양이가 살아있는지 확인하려면 상자를 열 수 밖에 없다는 것도 알았다. 당신이 소사를 안다면 소사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어렵다는 것도 알거다. 그리고 다행히 나는 만화 속 주인공 같은 게 아니다.
아무도 나의 말을 믿지 않아서 난 더 이상 내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의 과거를 궁금해해서 소사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상대의 반응은 다음 중 하나다.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잘 짓는다고 하는 부류. 그 세대가 아닌데 미심쩍어하는 부류.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건지 전혀 모르는 부류. 나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를 좋아한다. 거기서부터 청자는 앞서 말한 부류로 갈리고 결국 모두 끝까지 듣지 않는다. 덕분에 끝까지 말할 필요가 없다. 혹여 듣겠다면 먼저 묻는다. 당신은 소사를 아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