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들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설명하려고

by 박하


바다 위로 눈이 내리면 그대로 녹는다. 텔레비전에서 등장한 사람이 말했다. 당연한 말 아닌가? 그런 생각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화면이 돌아가는데 바다 위로 눈이 떨어지는 모습을 담은, 신비로운 영상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은 저만큼 신비롭네. 우리는 함께 숙제를 하고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숙제라는 변명으로 딴짓을 하며 놀고 있었다.

-그나저나 넌 넥타이 좀 편하게 벗으면 안되냐?

서리태는 교복 단추 하나 풀지 않고 넥타이를 반듯하게 멘 상태였다.

-이게 편해.

-어휴 진짜….

송골매는 왼팔로 머리를 받친 채 옆으로 누워 텔레비전을 봤다. 다른 손에는 리모컨이 들려 있었다. 나는 침대에 기대어 만화책을 읽었는데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서 처음부터 읽는 중이다. 이런 상태라면 오늘도 숙제는 서리태의 공책을 베끼는 수 밖에 없다.

귤을 하나 까며 각자가 최근 매료된 시시한 주제를 꺼냈다.

-나 요즘 잘 생겨진 것 같지 않냐?

놈은 갑자기 리모컨을 내려놓고 일어서며 말했다. 자신감 넘치는 송골매의 연애 이야기. 놈은 어느 순간 키가 부쩍 컸다. 하루마다 달라지는 게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컸다. 서리태는 키가 급격하게 자라면 성장통이 온다는 정보로 녀석의 자신감을 일축했지만 서리태의 반응없는 성장판을 생각하면 질투에 불과했다. 분명히 부러워하고 있을거다.

-얼른 졸업했으면 좋겠네.

-왜? 연애하고 싶어서?

도발하는 송골매의 말을 무시하고 서리태는 말했다.

-졸업하면 여행을 갈거야.

그리고 텔레비전을 가리켰다. 북극과 남극이, 펭귄과 캥거루가 있는 나라들이 차례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런 곳까지 가보고 싶어. 당장은 못 가겠지만.

-너는 공부 잘 하니까 대학교까지 들어가도 될텐데.

난 책상에 놓인 귤을 하나 집어 들며 말했다. 김숙이 가져다 놓은 과일이었다. 서리태의 집에 모여 하는 짓이라고는 늘 이모양이었기 때문에 사실 녀석의 공부를 우리가 방해하는 셈이었다.

-당장 갈 수 있어. 다음 주면 방학이잖아. 어디든 가면 되지.

송골매는 귤을 하나 던지라는 신호를 했다. 일부러 이상한 곳에 던졌더니 놈은 날렵하게 손을 뻗어 받아냈다.

-정신차려. 고등학생이 그럴 시간이 어디있어?

-우린 공부 못해.

나는 송골매를 노려봤다. 우리라는 말은 언제나 좋은 어감이었지만 이런 경우에 단 둘이 우리로 묶이는 건 사양이었다.

-그렇잖아? 99등은 1등을 별로 신경 안써. 2등만 1등을 신경쓰지.


꿈은 ‘이루다’와 ‘꾸다’ 보통 두 가지 동사가 붙는다. 움직일 동(動)을 써서 동사다. 꿈은 속성상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우린 그래서 움직였다. 움직이면 꿈대로 될 수 있으니까. 바다는 차고 고요했다. 파도 앞에 선 사람들은 우리 뿐이었다. 쉽지? 송골매가 으스대며 말했던 것 같다. 펭귄이 없어도 바다는 있었고 캥거루가 없어도 들판은 있었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돌아다니는 게 전부였는데 여기까지 와서 무얼하느냐고 서로가 서로에게 보채다가 결국 하는 짓이 똑같아서 말하기를 관뒀다.

결국 사는 게 그런 것 같다고. 서리태가 조용히 말했다. 그런데 사는 것에다가 항상 ‘잘’을 붙이고 싶어서 열심히 내달리는 모양새라면서.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나는 그 의견에 반박했다. 아니야. ‘잘’이 아니라 ‘좋은’을 위해서야. 좋은 것을 먹고 좋은 곳에서 자고. ‘잘’은 어디서나 할 수 있는거잖아. 우리는 허름한 민박에서도 잠을 잘 잤으니까. 컵라면을 먹어도 잘 먹었으니까.

-그래서 학교는 잘 다녔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김숙이 말했던 대안학교가 스쳐지나갔다. 거긴 좋은 곳이었을까. 열심을 쏟아내서 살면, 그래서 ‘잘’이 아니라 ‘좋은’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이라면. 좋은 학교에 가지 못한 나는 열심을 부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빈정이 상했다. 바다는 누가 뭐라고 하던 뭐라고 하지 않던 묵직하게 요동쳤는데, 난 누군가 뭐라고 할 때만 요동치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바다를 닮고 싶어하는구나.

모래사장 위에서 갑자기 달려간 송골매가 돌을 하나 줍더니 큼지막하게 어떤 이름을 썼다. 그게 누구? 애인 이름. 정신나간새끼. 꼭 어디선가 본 것들은 그래도 다 해볼 심산이었다. 이름이 밀려온 파도에 휩쓸려가고 나는 송골매의 애인 이름 따위가 무엇인지 더는 떠오르지 않는다. 바다까지 온 이유라던가. 그런 것들을 떠나 당장의 답답함은 누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어때 좀 만족해?

송골매는 서리태에게 물었다.

-부족하지. 펭귄이 없잖아.

두 녀석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나는 옷을 하나하나 다 벗었다. 미친놈을 본 듯 바라봤고 사람은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속옷까지 벗어버리고 실오라기 하나 없는 몸이 된 채 바다로 내달려 갔다. 바람이 아무리 불지 않았대도 겨울 바다는 차다. 눈이 내려 녹는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겨울의 바다는 차다. 그런데 속에서는 자꾸 열이 났다. 뜨겁다 뜨겁다 매일 밤 내게 말하는 할머니는 마음에 불이 붙었었나. 그래서 식혀버리려고, 모든 걸 삭혀버리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어, 저 미친놈 저거.

송골매는 왜? 재미있잖아. 하면서 옷을 재빠르게 벗어버렸다. 서리태도 마지못해 옷을 벗었다. 자신감있게 몸을 돌려 뒤로 바다 위 자빠지는 송골매와 심장에 물을 묻힌 뒤 들어오는 서리태. 전부 정신을 차리지 않는 와중에 정신을 차리기로 한 모양이었다.

물은 따뜻했다. 사실 몸 속의 열과 바다의 온도가 같아져서 그렇게 느끼는거다. 교육은 항시 두루뭉술한 경우를 이해시켜왔다. 그러나 겨울 바다에 훌렁 옷을 벗어던지고 뛰어드는 감정을 이해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글이, 책이 태어난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을 설명하려고 아등바등 애를 쓴다. 개헤엄을 추며 바다를 휘젓는 나처럼.

-소년만화 주인공들이 보통 이러지?

가방에서 꺼낸 수건으로 몸을 슥슥 닦은 뒤에 송골매가 수건을 건넸다. 머리칼 끝은 벌써 매섭게 얼어 무스를 발라 둔 마냥 멋대로 갈라져 붙었다.

-미친놈들아. 진짜 이랬어야 했냐. 펭귄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무기 저건 펭귄인 줄 알고 뛰어드네.

서리태를 웃긴 것으로도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어때? 펭귄을 본 소감은?

-부족해. 펭귄은 너보다 귀여우니까.

-이 자식이야말로 미친놈이야. 떨어져, 가까이 가지마 무기.

그렇게 시시콜콜 웃고 있었다. 무엇이든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매일매일이 다채로웠다.


-그래서 너는?

둘이 동시에 나를 돌아봤다. 표정이 없었다.

질문이 남아서 둥둥 떠다녔다.



나는? 그래 너는.

꿈이라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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