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고 싶지. 묻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항상 시작이 어렵네. 잘 지내지? 잘 지내겠지. 손으로 직접 쓰는 게 아닌데도 익숙하지가 않아 괜히 쑥쓰러워. 계속 하다보면 자연스레 할 수 있게 되는 일들처럼 이것도 그럴지 몰라. 그래도 장담은 못 하겠어. 영원히 낯선 일도 있기 마련이니까. 소문은 여전히 많네. 사실도 진실도 뒤죽박죽 섞여서 다니고 자꾸 거짓을 곁들여서 재미로 만드는 것 역시 여전해.
사람은 저으면 저을수록 굳기가 단단해지나봐.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사실 송골매랑 멀어지는 게 두렵지는 않아. 그것보단 가슴이 찌릿해서 그러지. 그래 그건 나의 잘못이었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일이었지. 내 숱한 노력과 또 불가항력과 상관없이 수많은 선택지 중 어쨌든 택한 게 바로 나 자신이니까. 책임이야. 언젠가 말할 수 있게 되겠지. 미안하다고. 정말 미안했다고. 송골매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까. 용서를 먼저 바라면 사과가 아니게 될텐데 그 용서에 자꾸 신경이 쓰여서 아무 말도 못하게 되는거야. 미련한 오해로 틀어진 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질 때까지.
그럼 나는 뇌에 힘을 주고 참아야 해. 너도 알지? 세상에서 오해가 가장 쉬운 거. 그리고 오해를 뒤집기가 가장 어렵다는 거. 사람에게 박힌 생각을 바꾸는 거. 그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해보는 거. 대부분의 사람은 오해한 자신의 마음을 뒤바꾸느니 오해한 채로 멀어지길 택하니까.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마음을 바꾸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때가 있어. 잘못은 어찌어찌 하면 제자리에 돌릴 수도 있는데 사람 마음은 그게 잘 안돼. 속마음을 다 털어놓는다한들 쉽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냐. 있지,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어. 그런데 사람끼리의 관계는 그게 아냐. 그래서 더 어려워.
무슨 일이든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네가 내게 말했던 뒤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내 생각해봤어. 내 성향은 뭐랄까, 오히려 진짜 본심은 꽁꽁 숨겨야 해. 잠깐이라도 솔직함이 드러나면 상대는 그게 마음을 전부 드러낸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니까. 그럼 ‘나에게만큼은 전부 이야기해주는구나’, ‘나는 이 사람한테 특별하구나’ 그렇게 믿게 되는거지. 그런데 비밀스러운 사람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솔직함을 일정량 던져주면 상대가 그렇게 믿게 된다는 걸 아주 잘 알거든. 다 안다고 착각하는 상대를 이용하는 게 뭐가 나빠? 그것만 진실이라고 전부 믿는데. 약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 그런데 인간은 다 약았어. 속이지 않으면 속고 말아. 어디 욕을 하려면 해봐.
그래 나는 나빠. 나쁜 사람이지. 피해망상에 시달리고 있나봐. 불행이니 행복이니 자기연민이니 어려운 말을 진지하게 하면 동정심을 얻을 수 있거든. 그런데 입으로는 동정하지 말라고 말해. 모순이야. 오해를 맘 편히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어. 견디는 척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걸 무척 잘 하게 된 사람인거야. 인간은 본질적으로 사랑받길 원하니까. 그런데 난 사랑을 독이라고 생각해. 애정에 중독된 사람 중에도 남이 받을 애정까지 빼앗아 자기걸로 만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족속들이 있어. 신은 왜 그런 사악한 본성을 인간에게 심어둔 걸까. 이렇게 말하면 모두가 꺼림칙한 표정이 됐지.
인과관계를 생각하면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어. 하지만 모두 다 그럴까? 이유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럼 가장 최초의 원인은 뭐라고 생각하니? 거기엔 이유가 없는 일이 살고 있지. 운명을 말하는 건 아니야. 본능이지. 다른 개체를 제쳐야, 제압해야 내가 살 수 있다는 동물적 본능. 교육이 그 본능을 억제하는 수단이 된다면 고등 교육을 마친 인간이 보호해야 할 것은 뭘까.
우리가 주장할 때 어른들은 고집을 피운다고만 말했었지. 심성에 고약한 고집이 얼마 쯤 있었을지도 몰라. 행여 어른들이 본인의 실수를 알고 나면 하는 말이 있잖아. ‘서로 좋게 좋게 갑시다.’ 좋게 좋게 가자는 말이 난 왜 그렇게 싫었던걸까. 분노를 잉태하게 만드는 방식이 싫었어. 소사가 말했던 입장이라는 말처럼. 인간에게는 모두 저마다 입장이 있는 법이고 모두가 좋을 방식을 이야기 할 때마저도 자기에게 조금이나마 더 유리한 방향으로 힘겨루기를 하더라. 그러다 폭발해. 저런 짓을 도대체 왜 하고 있는걸까. 누구를 위한 ‘좋게 좋게’냐고. 묻고 싶지. 묻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고.
그냥 너를 부러워한다고 말할래. 너의 심정이 어떨지는 모르니까 상황만 부러워하려고. 그저 휘뚜루마뚜루 돌아다니고만 싶어. 언젠가 여행을 가보자고 말했던 날처럼. 정처없이 다니는 일은 아름다울거라도고 했었지. 그 때 우리한테는 자유로운 행위 자체가 동경이었던걸까. 그래서 다른 소식을 더 말하지는 않을거야. 아, 이해할 수 있지만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있지 않나. 선을 그어놓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만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한 위치의 마음도 있지 않나. 그런 생각으로 말이야.
요즘 너무 집중을 하고 있어서, 어느 생각에 빠져버려서 멍하니 넋을 놓게 되는 경우가 있어. 혼자 있을 시간이 부쩍 많아져서 그런지도 몰라. 더불어 책을 읽는 시간도 늘었고.
이렇게 잔뜩 어른인 척을 해봤네. 솔직히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어.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소사로 살았어야 했다는 걸 생각하면. 나는 오해를 하고 싶다. 소사를 잔뜩 오해하고 싶어. 순수하게 오해를 가져야만 관련없는 사건에 원한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기차역 앞에는 노숙자들이 있다고 너는 서울에 대해 이야기 했지. 송골매나 내가 생각한 것처럼 마냥 좋은 곳이 아닐거라면서. 그 사람들은 어떤 연유로 집을 잃고 길에서 지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어. 누군가 만약에 궁금증이 심하게 도져 물어봤더라도 말을 하지 않았던건지 몰라.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세요.’ 그러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한 번 만져 보셔도 괜찮아요.’말할 사람은 없겠지. 실패를 납득하고 인정하고, 혹은 인정하지 못했는데도 살아있어서 주목받지 않는 인생은 비밀이 된거야.
이제 나는 지금이라도 숨겨보려고 해. 내 뜻대로 알려지는 이야기가 제멋대로 남들의 재미가 되도록 두지는 않고 싶어. 그게 마음 어딘가를 망가뜨리더라도 더 아프지는 않을 것 같아.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여기서 솔직해버렸구나.
어때, 너도 비밀이 많은 사람이될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