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젊어서 자라

나이 들면 잠 안 온다.

by 박한얼 Haneol Park

우리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다. 알게 모르게 노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가득하지만 결국 모두가 한 번 씩은 그 차별과 혐오 속으로 들어가야만 할 때가 온다. 작년 8월,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나는 노화와 노년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고 요즘은 노인상담 강의를 듣는다.


혼자 남은 할아버지는 부쩍 우울감을 많이 느끼신다. 항상 외향적이고 씩씩해 보이기만 했던 할아버지의 어둡고 쓸쓸했던 이면이 죽음을 앞두고 드러나기 시작했다. 5~6년 전만 해도 괜찮았는데, 요즘은 옛날 생각도 잘 안 나고 필름이 끊기듯이 생각이 툭 끊겨버린다고 하신다. 주위 사람들도 한 두 명씩 세상을 떠나고 과거를 회상하다 보면 후회되는 일, 상처 받은 일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자식들도 연락 한 달에 한 번 해줄까 말까인데 나라에서 돈 받고 일하는 사회복지사는 이틀에 한 번씩은 전화해준다고, 가끔 볼 일을 보다 전화를 놓치면 '독거노인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하고 바로 찾아와 준다고, 아마 자기가 죽으면 자식들보다 사회복지사가 먼저 발견해 줄 거라고 내게 울면서 토로하신 적도 있다.


할아버지의 이런 마음속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알게 된 것이 있다. 악순환은 나이가 들수록 끊어내기 어려워진다.


우리 할아버지는 청소년기 때 가난과 전쟁을 겪으며 자라셨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누가 돈가스를 사준다고 연락하면 교통비도 없어서 5시간 거리를 걸어가 허겁지겁 먹고, 5시간 거리를 되돌아와서 다시 배고파야 했을 정도라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것에 대한 한도 엄청나시다. 자기가 제대로 배운 사람이었다면, 더 높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 거라고. 할아버지는 당장 살아남아야 하니 생존 기술만을 터득하느라 삶의 지혜나 통찰을 얻을 새가 없으셨다. 결혼도 얼떨결에 하셨다. 그렇게 해야 된다고 배웠으니까 해야 된다는 대로 하고 사셨다. 맞선을 보고, 선물을 하고,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책임져야 하니 열심히 돈을 벌다가 노인이 되셨다. 할아버지는 육아는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배웠기에 할머니에게 아빠와 작은 아빠의 가정교육을 맡기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의견이 맞지 않아 항상 싸우셨고, 할아버지가 일하러 가시면 할머니는 할아버지 욕을 했다. 그렇게 자식들은 가정 불화 속에서 자라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손주에게까지 내려오는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는 나와 함께 그 악순환의 끝을 겪고 있다.






가정 불화 속에서 자란 아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대한 양가감정이 극심했다.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극도로 혐오한 것 같다. 본인의 부모님을 혐오한다는 것은 정말 괴로운 일이다. 나 자신의 존재마저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할머니가 췌장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빠가 한 말이 있다.


"죽을 때가 됐나 보지 뭐, 그렇게 사니까 그렇게 가는 거지."


사랑하지만 미워할 수밖에 없어 슬픔의 표현도 저렇게 삐뚤어지게 나왔나 보다. 아빠는 할머니를 찾아뵌 적이 없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선 그렇다. 남보다도 못 한 사이 같아 보였다. 그런데 할머니의 장례식 날, 입관식 때 할머니의 모습을 보고 아빠는 미친 듯이 울어댔다. 거의 절규하듯이, 곧 기절할 사람처럼 얼굴이 터져라 울었다. 나도 눈물을 훔쳤는데, 찾아 뵐 때마다 한결 같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봐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셔서인지 아빠의 그런 모습을 봐서인지 아님 둘 다인지 모르겠다. 많이 슬펐다.






삶의 끝락에 놓인 할아버지는 혼자 쓸쓸히 과거를 회한하신다. 억울하고 분하면서도 미안하고 속상하다. 비통한 생각이 들면 잠도 잘 못 주무신다. 원래 노화가 진행될수록 뇌에 노폐물이 쌓여 깊은 잠을 방해한다고 한다. 그래서 노인 분들께서 깊게 잠들지 못하고 얕은 잠을 자다 경미한 빛에도 일찍 깨버리시는 것이라고. 게다가 노년기의 정서를 정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면, 변화된 삶에 대한 적응의 어려움까지 생긴다. 그래서 우울과 불안이 느껴지고, 그 와중에 감정 변화는 전두엽의 기능 저하로 인해 조절마저 잘 되지 않는다. 이 모든 것들이 할아버지의 잠을 방해할 것이다. 실제로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밤을 새우듯이 생활하신다. 그래서 나에게 하신 말씀이 있다.



"잠은 젊어서 자라. 나이 들면 잠 안 온다."



잠이 많아서 고민이던 친구는 할아버지가 하신 이 말씀을 내게서 전해 듣고는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다고, 더 열심히 자고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이 말씀이 나도 참 인상적이었다.

나는 이 말씀에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읽히는 대로, 잠은 젊어서 푹 자 둬야 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도 있겠지만, 악순환은 젊어서 끊어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이해된다. 난 정말 행복해져야겠다. 그리고 선순환을 시작해야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