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이 천천히 깎이나 봐

그러다가 바닥일 때 딱 느껴지고

by 박한얼 Haneol Park


내가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 했을 때, 의욕도 없었을 때, 세상만사가 다 내 뜻대로 되지를 않는 것 같았을 때. (애초에 세상사 생각대로 되는 일은 없다.) "답답해 죽겠고, 뭔가 해야 될 것 같고, 쫓기는 기분도 들고, 세상과 멀어지는 것 같고, 나이 허투루 먹는 것 같고..."라고 했더니 친구가 말해주었다.



"근데 진짜 우리 아직 어리고, 실패할 나이야, 불안하고..."



말 불안하다. 내 안의 알록달록한 자아들이 서로 싸운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고. 혹은 역시 난 틀렸다고, 네가 맞다고. 그럼 도대체 맞는 건 뭐고 틀린 건 뭔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데? 평범하고 무던한 삶은 가치가 없는 건가? 열정적이고 성취적인 삶을 살아야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양보하면 멍청한 거고 일일이 챙길 건 챙겨야 똑똑한 건가? 피해를 당하면 그저 내가 아직 멋모르고 나약한 탓인 걸까? 피해를 줬다면 난 벌 받아야 하는 인간인 걸까? 왜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고 의문투성이인 건데?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답, 내 삶, 내 경험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나의 정답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다.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모든 게 너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일 수도 있다. 그냥 하면 되지,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지. 그런데 행동으로 옮겼다가 상처만 남은 적이 더러 있었고 그래서 생각이 너무 많다. 상처 받을수록 나는 점점 더 신중해져만 갔다.

그런데 우린 살면서 상처를 아예 안 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스스로를 죄책감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용기와 지혜로움, 그런 힘이 필요하다. 내 상황이 열악하다면 열악한 걸 정확히 알고 받아들인 채 행동해야한다. 그게 바로 자존감이다.






사람들은 '자신감'보다 '자존감'에 대한 언급을 더 많이들 하는 것 같다. 예전엔 마냥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Love yourself, 이런 말들이 많았다면 요즘엔

'자존감이 낮으면 낮은대로 살아도 된다' 라고, 그냥 인정해주는 말들도 하곤 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ASMR 유튜버, 미니유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나는 자존감은 '자신감 그다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좋은 기회를 통해 적절한 자신감을 획득할 때에 내 자존감을 챙길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감만 키워버리면 '자존심'으로 변질되고, 그러다 성격이 더러워져(?)서 신나게 막말을 퍼부어놓고는 되려 자기가 상처 받고 큰소리치는 경우도 봤다. (그래서 그 사람과 연을 끊었다.) 자신감이 부족할 때에는 뭘 하나 할 때에도 눈치 보게 되고 일일이 남의 의견을 신경 쓰게 된다. 내가 충분히 자신이 있고 목표가 뚜렷해 눈앞을 흐리는 세상의 말들이 하나도 상관 없어지면 자존감은 알아서 올라간다. 자존감을 케어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전에 자신감이 먼저 필요하다.


자존감에 대해서,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상처 난 자존감이 회복되려면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갑자기 괜찮아지는 건 없는 것 같애. 요즘 천천히 느리더라도 계속 기분이 나아지고 있는 게 느껴져."


"오! 좋은 일이네! 너 충분히 열심히 사니까 너를 믿어. 자존감이 천천히 깎이나 봐. 그래서 바닥일 때 딱 느껴지고, 그래서 천천히 올라가고."


친구 말대로 자존감은 천천히 깎인다. 독이 서서히 퍼지는 것처럼, 일상 속에서 겪는 사소한 실패감들이 우리를 점점 그렇게 만든다. 우리의 매일에는 성취감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천천히 회복될 수 있도록.





어느 쾌청한 일요일 가을 아침, 엄마와 함께 등산을 갔었다.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정상까지 남은 Km 수는 줄어들지를 않고,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으니 잠깐 앉자고 했다. 나는 챙겨 온 물을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다 너무 무리하면 다음 날 일상생활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그만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했다. 그때 엄마는 아니라고, 정상은 보고 가야 된다고 오히려 나를 말렸다. '그래, 일단 한 번만 더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다 보니 갑자기 정상이 코앞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3분의 1밖에 못 온 것 같았는데? 갑자기 정상 직전이란다. 정상까지 300m밖에 안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고 엄마와 나는 믿지 못했다. 깜짝 놀랐다. 그때 든 생각이, '사람들은 되기 직전에 포기한다'는 말이다.


잠깐 쉬어가는 것도 좋고 무리하지 않는 것도 좋지만, 포기하는 건 나쁜 것다.

종종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곤 하는데, 인생에선 그 무엇도 내가 얼마나 도달했는지 등산처럼 남은 거리를 친절하게 표시해주지 않는다. 하나씩 하나씩, 또 한 번 더 해나가다 보면 자신감도 자존감도 되찾아줄 행운이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날씨도 중요하고, 노력도 필요하지만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사소한 이유로 자신감을 잃지는 말자. 어차피 모든 일은 1%의 운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를 인정해줄 필요도 있다. 그렇게 점점 확신을 얻어 가자.


그날, 정상에 올랐을 땐 매우 기뻤고, 내려올 땐 왜인지 매우 힘들었다.




keyword
이전 09화신과 노예는 종이 한 장 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