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무런 기회도 잡지 못 했을 때, 의욕도 없었을 때, 세상만사가 다 내 뜻대로 되지를 않는 것 같았을 때.(애초에 세상사 생각대로 되는 일은 없다.) "답답해 죽겠고, 뭔가 해야 될 것 같고, 쫓기는 기분도 들고, 세상과 멀어지는 것 같고, 나이 허투루 먹는 것 같고..."라고 했더니 친구가 말해주었다.
"근데 진짜 우리 아직 어리고, 실패할 나이야, 불안하고..."
정말 불안하다. 내 안의 알록달록한 자아들이 서로 싸운다.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고. 혹은 역시 난 틀렸다고, 네가 맞다고. 그럼 도대체 맞는 건 뭐고 틀린 건 뭔데?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데? 평범하고 무던한 삶은 가치가 없는 건가? 열정적이고 성취적인 삶을 살아야만 잘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건가? 양보하면 멍청한 거고 일일이 챙길 건 챙겨야 똑똑한 건가? 피해를 당하면 그저 내가 아직 멋모르고 나약한 탓인 걸까? 피해를 줬다면 난 벌 받아야 하는 인간인 걸까? 왜 세상은 이렇게 복잡하고 의문투성이인 건데?
정신 차리고 보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답, 내 삶, 내 경험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나는 나의 정답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에 있는 것 같다. 20대 중반이 된 지금까지도 모든 게 너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진다. 어쩌면 내가 생각이 너무 많은 탓일 수도 있다. 그냥 하면 되지,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있지.그런데 행동으로 옮겼다가 상처만 남은 적이 더러 있었고 그래서 생각이너무 많다. 상처 받을수록 나는 점점 더 신중해져만 갔다.
그런데 우린 살면서 상처를 아예 안 줄 수도, 안 받을 수도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스스로를 죄책감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용기와 지혜로움, 그런 힘이 필요하다. 내 상황이 열악하다면 열악한 걸 정확히 알고 받아들인 채 행동해야한다. 그게 바로 자존감이다.
사람들은 '자신감'보다 '자존감'에 대한 언급을 더 많이들 하는 것 같다. 예전엔 마냥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Love yourself, 이런 말들이 많았다면 요즘엔
좋은 기회를 통해 적절한 자신감을 획득할 때에 내 자존감을 챙길 마음의 여유도 생긴다. 자존감이 너무 낮아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감만 키워버리면 '자존심'으로 변질되고, 그러다 성격이 더러워져(?)서 신나게 막말을 퍼부어놓고는 되려 자기가 상처 받고 큰소리치는 경우도 봤다. (그래서 그 사람과 연을 끊었다.) 자신감이 부족할 때에는 뭘 하나 할 때에도 눈치 보게 되고 일일이 남의 의견을 신경 쓰게 된다. 내가 충분히 자신이 있고 목표가 뚜렷해 눈앞을 흐리는 세상의 말들이 하나도 상관 없어지면 자존감은 알아서 올라간다. 자존감을 케어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전에 자신감이 먼저 필요하다.
자존감에 대해서,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상처 난 자존감이 회복되려면 시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갑자기 괜찮아지는 건 없는 것 같애. 요즘 천천히 느리더라도 계속 기분이 나아지고 있는 게 느껴져."
"오! 좋은 일이네! 너 충분히 열심히 사니까 너를 믿어.자존감이 천천히 깎이나 봐. 그래서 바닥일 때 딱 느껴지고, 그래서 천천히 올라가고."
친구 말대로 자존감은 천천히 깎인다. 독이 서서히 퍼지는 것처럼, 일상 속에서 겪는 사소한 실패감들이 우리를 점점 그렇게 만든다. 우리의 매일에는 성취감이 필요하다. 믿음으로,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붙잡을 수 있어야 한다. 천천히 회복될 수 있도록.
어느 쾌청한 일요일 가을 아침, 엄마와 함께 등산을 갔었다. 아무리 오르고 올라도 정상까지 남은 Km 수는 줄어들지를 않고,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못 가겠으니 잠깐 앉자고 했다. 나는 챙겨 온 물을 마시며 잠시 숨을 돌리다 너무 무리하면 다음 날 일상생활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아 그만 포기하고 내려가자고 했다. 그때 엄마는 아니라고, 정상은 보고 가야 된다고 오히려 나를 말렸다. '그래, 일단 한 번만 더 가보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걷다 보니 갑자기 정상이 코앞이었다. 정말 이상했다.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3분의 1밖에 못 온 것 같았는데? 갑자기 정상 직전이란다. 정상까지 300m밖에 안 남았다는 표지판을 보고 엄마와 나는 믿지 못했다. 깜짝 놀랐다. 그때 든 생각이, '사람들은 되기 직전에 포기한다'는 말이었다.
잠깐 쉬어가는 것도 좋고 무리하지 않는 것도 좋지만, 포기하는 건 나쁜 것이다.
종종 인생을 등산에 비유하곤 하는데, 인생에선 그 무엇도내가 얼마나 도달했는지 등산처럼 남은 거리를 친절하게 표시해주지 않는다. 하나씩 하나씩, 또 한 번 더 해나가다 보면 자신감도 자존감도 되찾아줄 행운이 찾아올지 모를 일이다. 날씨도 중요하고, 노력도 필요하지만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으니 사소한 이유로 자신감을 잃지는 말자. 어차피 모든 일은 1%의 운을 필요로 한다. 스스로를 인정해줄 필요도 있다. 그렇게 점점 확신을 얻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