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릴 적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인 줄 알았다. 내가 태어나 38년을 사는 동안 엄마를 엄마로만 알고 살았으니 어쩌면 당연하다. 평소 웬만하면 괜찮다고 말하는 K장녀인 내가 엄마에게 독일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넌 엄마가 있어서 좋겠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이었다. 처음으로 힘들다고 말하는 딸에게 엄마는 엄마의 삶을 이야기해 주셨다. 엄마가 결혼한 지 2년이 좀 안 됐을 무렵 외할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 기댈 곳 없이 살아온 딸의 이야기. 단 한 번도 친정 엄마 찬스를 써보지 못하고 살아오셨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찡해졌다. 나는 이렇게 감정을 털어놓을 엄마라도 있는데 엄마는 어디 말할 곳 없이 지금까지 버텨 오신 걸 생각하니 힘들다고 투정 부린 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 말처럼 다행히 나는 친정엄마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살지만, 마음 한 구석이 언제나 든든하다. 우울감이 찾아온 이후로 인생이 쳇바퀴 같다는 생각이 들어 때때로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삶을 내려놓고 싶어지기도 했다. 아이들의 작은 짜증에도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본인은 편하게 사는 것 같은 남편의 모습에도 천불이 났었다. 남편 하나 믿고 결혼했고 남편 하나 따라 독일까지 온 내가 바보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 말을 듣고 보니 그래도 난 엄마가 있고 내 아이들에게 엄마와 같은 엄마로 남아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